공부라는 것에 대한 팁과 기초 원리 3부
이번 3부에서는 2부가 상당히 난해하고 예시가 불충분하며
난해 했던 글이기에 쉬어가는 겸 조금 다른 글을 씁니다.
이번 글 주제들은
제가 제 그 전 수준을 뛰어넘는 과정에서 느낀바 있고 대중들도 이 주제에 대해서 잘못 아는 경우가 있단 오해를 집중해서 풀어보고자 합니다.
###3부: 공부와 노력에 대하여###
###공부와 괴로움###
1. 공부는 괴로운 고행인가? 그렇다면 뭐에 대한 괴로움이어야 하며, 얼마나 괴로워야 하는가?
대부분 공부를 괴로움으로 알고 참으려는 대상으로 보는 것은
이번 시대, 젊은 세대로 갈 수록 그 정신 세뇌 작용이 사라지는 중입니다.
상당히 다행이나 이런 아이디어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왜냐면 이는 군중-생물학적 작용에서 발원한 것이기 때문이죠.
이런 아이디어들을 볼때 독자여러분이 가져야 할 태도는 이 아이디어가 사회에서 무슨 작용으로 인한 것인지 묻는 것입니다.
"공부는 괴롭고 고행이라는 저 아이디어는 무슨 사회작용입니까?"
바로 노동집약적이며, 관료적인
농경/제조업 중심 사회에서 근면 성실로 태도를 증명해서
남에게 보이려는 식으로 결가를 내고,
결과의 질에 대한 비판을 피하려던 군중적 작용입니다.
"열심히 했다"라는 사실을 내는 차원의 행위를 먼저 해서 노력이라는 것을 증명해서
비판을 피하는게 생물학적으로 유인이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집단 세뇌 속에서 자신도 믿을 수 있게 고통스럽게 공부하면 차후에 결과가 안 좋더라도
면피까지 받을 수 있다는 일석이조 효과가 있는 방법입니다.
이는 사회적 신호로서의 행위대상으로서 부차산물로 나오는 공부이며 남의 의식을 한 것에 가깝기에 수동적 공부라고 할수 있습니다. 의도 하지 않았더라도 남을 의식해서 경쟁적으로 한 것이고 피해의식과 일부러 고통을 충족하는게 목표였던 것이기에 이에 휘둘린 것이며, 공부의 방해작용만을 반작용으로 받아 실제로 효율이 떨어질겁니다.
이런 작용 자체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위의 작용은 사회의 모든 생물학적 작용은 생물의 생존을 위한 것이니 사회에서는 집단 차원에서 생물학적으로 필요할 것이되,
이를 더 나은 질의 공부에도 적용해서는 해오던 것 이상의.결과를 못 주니 안된다는 것이죠..
독자여러분은 위의 작용을 자각하는 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공부는 고행이다를 독자여러분은 어디에 투영하셨는지 자문해야 합니다..
어디가 고행이었습니까?
바른 질문에 대한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공부에서 괴로운 것이 아예 없진 않습니다.
저의 경험에 근거해서 답을 드리겠습니다.
그 괴로움이란 다음에 한정되었습니다:
처음에 공부 대상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환경문맥들을 만들지 않고 주입받은 수동적 공부법에서 탈피해서
하나하나 스스로 바르게 행위를 바꾸는 규칙세우기, 실천 행위를 결심하는게 저에게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흔히 말하고 믿듯, 공부 대상을 학습 하는 행위 차원에서는 오히려 괴로움은 그 전의 잘못된 패러다임을 가지고
공부할 때에 비해 현저하게 줄었습니다.
위와 같은 차원에서 접근을 하니 오히려 그전에 이해가 되지 않던 것들이 갑자기 풀리는 쾌감이 느껴졌죠.
즉 이 새로운 공부법에서는 주체적으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내가 스스로 의미를 내서 정할때 고통스러웠습니다.
타성에서 벗어나서 내가 직접 이를 주체적으로 정할때 고통스러우며 이는 한번 하고 나면 사라지는 고통입니다.
공부 자체는 이렇게 하면 주체적이기에 더이상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지난 1편에서 언급 되었듯, 공부 그 대상 학습 자체가 계속 괴롭다면,
당신의 공부 방법 즉 공부 대상을 학습하는 수단, 방법, 공부법, 접근법이 잘못된 것이 아닌지 자문해야 합니다.
이는
대부분 너무 불안해서 내가 익숙한,다른 것을 파훼하던 방법을 이 새로운 공부대상에.무분별하게 적용해서 그치지 못하고
중독된 것 처럼 그 방법을 이 공부 대상에 써서 그렇습니다.
이를 인정하고, 현재 능률이 없는 방법을 놓고, 내가 믿고 싶지 않던 귀찮던 근본적이라고 대가들이 말하던 다른 방법을,
하기 싫더라도 하도록 결심하고
그걸 실행할 방법을 주체적으로 고안하는 것이 괴로운 고행으로 저에겐 느껴졌고
공부 대상을 학습하는 것은 바른 방법을 인정하고 체험해서 숙달된 상태에서는 괴로움이라는 표현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결심행위- 실천행위로 이어질 때 고통이 크지만, 이는 충분히 저에게 시간을 주고, 계획을 하며,
한번 해보면 효과가 바른 공부법이기에 그 후로는 역설적으로 그때까지 공부에서 받았던 고통이 없게 됩니다.
예로 제가 영어나 코딩을 잘못된 방법으로 공부할 때 고통은, 잘못된 방법인줄 모를 때는 모르나
바른 공부행위를 세우고 그걸 따르니 그 전에 하던 고통이 사라짐을 자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 방법을 따를 대에도 학습시에 고통이 완전히 없을 수는 없겠죠.
물론 어느 정도의 괴로움은 사람마다 있겠고 완전히 그런 요소가 없는 상태는 아닐 것이지만 말이죠.
###공부와 노력###
2. 공부는 노력인가? 그렇다면 그 노력은 무엇이며, 얼마나 해야 하는가?
위와 마찬가지로 노력이라는 것이 뭘로 이뤄진 것을 투영중인지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자각하는 독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노력은 위의 고행 괴로움과 연관된 주제라 2번 항목으로 잡았습니다.
독자여러분은 괴로움을 노력으로 착각 하고 살지는 않으셨나요? 그렇다면 타인에게 알리바이, 결과가 없을 때 면피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공부가 독자여러분의 공부의 주제가 됩니다.
이렇게 잘못된 것을 인지하지 못하면 공부라는 것은 함수이기에 결과가 그 요소에 휘둘립니다.
노력은 자신이 이 행위의 결과의 책임을 질 것임을 분명히 하고, 그에 따라서 공부 목적 ㅡ 1. 거창하게는 인생 차원 2. 작게는 이 공부로 성취될 목적 ㅡ 에 맞는 외부요인 및 필요행위 파악 및 행위의 결과 트래킹 등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무작정 밤을 세우거나 연습장에 쓴 횟수 등으로 노력이라는 단어 정의가 그에 한정되어 그친 수준이라면
그것은 협소한 의미의 노력이 되어 버립니다.
바른 노력은 결론적으로 위의 항목 1인 괴로움 고행과 비슷합니다.
저의 경우 우선적으로 근본적 노력의 대상은,
반복 횟수나 시간투입 차원이 아닌,
현재 나의 수준과 형세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분석하고
해야 하는 일을 하는지, 무엇을 해야 무엇이 행동으로 나와야 목적달성에 타당한지 따지는 차원에서 노력을 했습니다.
익숙하지 않고 내키지 않아도 목적에 맞다면 해야 하는 일을 결심하는 의미 결심 및 실천함이라는 차원에서 노력을
했습니다.
이와 대비되어 연습장 10장에 반복해서 쓰기 100번 말하기 만으로 노력을 정의하는게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봅시다.
후자의 경우도 에너지가 투입된다는 차원에서 따진다면 노력이기는 하지만
여기 이 문장들에는 이 행위가 현재 나의 목적에 어떻게 맞는지 등이 정보가 빠져 있습니다.
이 문장들이 묘사한 행위 자체가 노력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며, 제가 위의 행위들을 안 했다는 말로 받아들이는 독자는 없길 바랍니다.
예로 이런식으로 한 것이 우리가 지향할 의식입니다 ㅡ
"나의 경우 100번 말하기 때 내가 어떻게 해왔는데 이 공부법은 뭐와 비교하면 결과적으로 효과가 없었었다 ㅡ 사실 생각해보니 내가 100번 말하는 식으로 연습할때 내가 이걸 공부 행위로 보아왔지만 그냥 놀이화된 요식행위 처럼 하더라ㅡ 요즘 내가 아는 스승이 기본기를 강조하며 하라고 한 다른 방법인 x를 해서 해보니 이것보다 잘되었고 이걸 병행하면서 하겠다" 식으로 말한 것과 비교해봅시다. 이 문장은 내 현재 학습 수준에 대한 성찰과 스스로 실험을 했다는 정보와 피드백, 하기 싫지만 새로운 방법과 비교해서 내가 하던 행위가 가진 효율 파악 등 복합적 자기 성찰이 추가된 문장으로 보입니다.
이문장은 단지 양적으로 몇가지 표현이 추가된문장이 아닙니다. 행위자가 성찰하고 의도를 세운 측면에서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것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단지 "100번 입으로 말하기"와 다른 요소들이 결합되어 보이는 것으로만 이해하지 마시고,
저 문장에서 자기 자신의 공부 방법과 과거의 공부법의 결과 등에 대한 내용적 성찰, 공부행위에 피동성이 아닌
주체성 등이 들어간 것을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이처럼 주체적으로 의미를 잡아감이 진정한.노력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100번 단어를 썼다. N번 입으로 말했다 식의 행위에 그치는 것과 비교하면 질적 내용이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죠.
1부에서 주체적으로 의미를 잡아간다 식의 표현을 썼고
어떤 분은 쿵푸가 연상 된다고 하셨는데 어찌보면 고차원 추상 철학이 연상되었을 지 모르나, 사실은 의미를 풀어 얘기하고 과학적으로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는 행위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 또 뵙겠습니다.
난해 했던 글이기에 쉬어가는 겸 조금 다른 글을 씁니다.
이번 글 주제들은
제가 제 그 전 수준을 뛰어넘는 과정에서 느낀바 있고 대중들도 이 주제에 대해서 잘못 아는 경우가 있단 오해를 집중해서 풀어보고자 합니다.
###3부: 공부와 노력에 대하여###
###공부와 괴로움###
1. 공부는 괴로운 고행인가? 그렇다면 뭐에 대한 괴로움이어야 하며, 얼마나 괴로워야 하는가?
대부분 공부를 괴로움으로 알고 참으려는 대상으로 보는 것은
이번 시대, 젊은 세대로 갈 수록 그 정신 세뇌 작용이 사라지는 중입니다.
상당히 다행이나 이런 아이디어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왜냐면 이는 군중-생물학적 작용에서 발원한 것이기 때문이죠.
이런 아이디어들을 볼때 독자여러분이 가져야 할 태도는 이 아이디어가 사회에서 무슨 작용으로 인한 것인지 묻는 것입니다.
"공부는 괴롭고 고행이라는 저 아이디어는 무슨 사회작용입니까?"
바로 노동집약적이며, 관료적인
농경/제조업 중심 사회에서 근면 성실로 태도를 증명해서
남에게 보이려는 식으로 결가를 내고,
결과의 질에 대한 비판을 피하려던 군중적 작용입니다.
"열심히 했다"라는 사실을 내는 차원의 행위를 먼저 해서 노력이라는 것을 증명해서
비판을 피하는게 생물학적으로 유인이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집단 세뇌 속에서 자신도 믿을 수 있게 고통스럽게 공부하면 차후에 결과가 안 좋더라도
면피까지 받을 수 있다는 일석이조 효과가 있는 방법입니다.
이는 사회적 신호로서의 행위대상으로서 부차산물로 나오는 공부이며 남의 의식을 한 것에 가깝기에 수동적 공부라고 할수 있습니다. 의도 하지 않았더라도 남을 의식해서 경쟁적으로 한 것이고 피해의식과 일부러 고통을 충족하는게 목표였던 것이기에 이에 휘둘린 것이며, 공부의 방해작용만을 반작용으로 받아 실제로 효율이 떨어질겁니다.
이런 작용 자체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위의 작용은 사회의 모든 생물학적 작용은 생물의 생존을 위한 것이니 사회에서는 집단 차원에서 생물학적으로 필요할 것이되,
이를 더 나은 질의 공부에도 적용해서는 해오던 것 이상의.결과를 못 주니 안된다는 것이죠..
독자여러분은 위의 작용을 자각하는 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공부는 고행이다를 독자여러분은 어디에 투영하셨는지 자문해야 합니다..
어디가 고행이었습니까?
바른 질문에 대한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공부에서 괴로운 것이 아예 없진 않습니다.
저의 경험에 근거해서 답을 드리겠습니다.
그 괴로움이란 다음에 한정되었습니다:
처음에 공부 대상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환경문맥들을 만들지 않고 주입받은 수동적 공부법에서 탈피해서
하나하나 스스로 바르게 행위를 바꾸는 규칙세우기, 실천 행위를 결심하는게 저에게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흔히 말하고 믿듯, 공부 대상을 학습 하는 행위 차원에서는 오히려 괴로움은 그 전의 잘못된 패러다임을 가지고
공부할 때에 비해 현저하게 줄었습니다.
위와 같은 차원에서 접근을 하니 오히려 그전에 이해가 되지 않던 것들이 갑자기 풀리는 쾌감이 느껴졌죠.
즉 이 새로운 공부법에서는 주체적으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내가 스스로 의미를 내서 정할때 고통스러웠습니다.
타성에서 벗어나서 내가 직접 이를 주체적으로 정할때 고통스러우며 이는 한번 하고 나면 사라지는 고통입니다.
공부 자체는 이렇게 하면 주체적이기에 더이상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지난 1편에서 언급 되었듯, 공부 그 대상 학습 자체가 계속 괴롭다면,
당신의 공부 방법 즉 공부 대상을 학습하는 수단, 방법, 공부법, 접근법이 잘못된 것이 아닌지 자문해야 합니다.
이는
대부분 너무 불안해서 내가 익숙한,다른 것을 파훼하던 방법을 이 새로운 공부대상에.무분별하게 적용해서 그치지 못하고
중독된 것 처럼 그 방법을 이 공부 대상에 써서 그렇습니다.
이를 인정하고, 현재 능률이 없는 방법을 놓고, 내가 믿고 싶지 않던 귀찮던 근본적이라고 대가들이 말하던 다른 방법을,
하기 싫더라도 하도록 결심하고
그걸 실행할 방법을 주체적으로 고안하는 것이 괴로운 고행으로 저에겐 느껴졌고
공부 대상을 학습하는 것은 바른 방법을 인정하고 체험해서 숙달된 상태에서는 괴로움이라는 표현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결심행위- 실천행위로 이어질 때 고통이 크지만, 이는 충분히 저에게 시간을 주고, 계획을 하며,
한번 해보면 효과가 바른 공부법이기에 그 후로는 역설적으로 그때까지 공부에서 받았던 고통이 없게 됩니다.
예로 제가 영어나 코딩을 잘못된 방법으로 공부할 때 고통은, 잘못된 방법인줄 모를 때는 모르나
바른 공부행위를 세우고 그걸 따르니 그 전에 하던 고통이 사라짐을 자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 방법을 따를 대에도 학습시에 고통이 완전히 없을 수는 없겠죠.
물론 어느 정도의 괴로움은 사람마다 있겠고 완전히 그런 요소가 없는 상태는 아닐 것이지만 말이죠.
###공부와 노력###
2. 공부는 노력인가? 그렇다면 그 노력은 무엇이며, 얼마나 해야 하는가?
위와 마찬가지로 노력이라는 것이 뭘로 이뤄진 것을 투영중인지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자각하는 독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노력은 위의 고행 괴로움과 연관된 주제라 2번 항목으로 잡았습니다.
독자여러분은 괴로움을 노력으로 착각 하고 살지는 않으셨나요? 그렇다면 타인에게 알리바이, 결과가 없을 때 면피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공부가 독자여러분의 공부의 주제가 됩니다.
이렇게 잘못된 것을 인지하지 못하면 공부라는 것은 함수이기에 결과가 그 요소에 휘둘립니다.
노력은 자신이 이 행위의 결과의 책임을 질 것임을 분명히 하고, 그에 따라서 공부 목적 ㅡ 1. 거창하게는 인생 차원 2. 작게는 이 공부로 성취될 목적 ㅡ 에 맞는 외부요인 및 필요행위 파악 및 행위의 결과 트래킹 등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무작정 밤을 세우거나 연습장에 쓴 횟수 등으로 노력이라는 단어 정의가 그에 한정되어 그친 수준이라면
그것은 협소한 의미의 노력이 되어 버립니다.
바른 노력은 결론적으로 위의 항목 1인 괴로움 고행과 비슷합니다.
저의 경우 우선적으로 근본적 노력의 대상은,
반복 횟수나 시간투입 차원이 아닌,
현재 나의 수준과 형세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분석하고
해야 하는 일을 하는지, 무엇을 해야 무엇이 행동으로 나와야 목적달성에 타당한지 따지는 차원에서 노력을 했습니다.
익숙하지 않고 내키지 않아도 목적에 맞다면 해야 하는 일을 결심하는 의미 결심 및 실천함이라는 차원에서 노력을
했습니다.
이와 대비되어 연습장 10장에 반복해서 쓰기 100번 말하기 만으로 노력을 정의하는게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봅시다.
후자의 경우도 에너지가 투입된다는 차원에서 따진다면 노력이기는 하지만
여기 이 문장들에는 이 행위가 현재 나의 목적에 어떻게 맞는지 등이 정보가 빠져 있습니다.
이 문장들이 묘사한 행위 자체가 노력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며, 제가 위의 행위들을 안 했다는 말로 받아들이는 독자는 없길 바랍니다.
예로 이런식으로 한 것이 우리가 지향할 의식입니다 ㅡ
"나의 경우 100번 말하기 때 내가 어떻게 해왔는데 이 공부법은 뭐와 비교하면 결과적으로 효과가 없었었다 ㅡ 사실 생각해보니 내가 100번 말하는 식으로 연습할때 내가 이걸 공부 행위로 보아왔지만 그냥 놀이화된 요식행위 처럼 하더라ㅡ 요즘 내가 아는 스승이 기본기를 강조하며 하라고 한 다른 방법인 x를 해서 해보니 이것보다 잘되었고 이걸 병행하면서 하겠다" 식으로 말한 것과 비교해봅시다. 이 문장은 내 현재 학습 수준에 대한 성찰과 스스로 실험을 했다는 정보와 피드백, 하기 싫지만 새로운 방법과 비교해서 내가 하던 행위가 가진 효율 파악 등 복합적 자기 성찰이 추가된 문장으로 보입니다.
이문장은 단지 양적으로 몇가지 표현이 추가된문장이 아닙니다. 행위자가 성찰하고 의도를 세운 측면에서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것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단지 "100번 입으로 말하기"와 다른 요소들이 결합되어 보이는 것으로만 이해하지 마시고,
저 문장에서 자기 자신의 공부 방법과 과거의 공부법의 결과 등에 대한 내용적 성찰, 공부행위에 피동성이 아닌
주체성 등이 들어간 것을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이처럼 주체적으로 의미를 잡아감이 진정한.노력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100번 단어를 썼다. N번 입으로 말했다 식의 행위에 그치는 것과 비교하면 질적 내용이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죠.
1부에서 주체적으로 의미를 잡아간다 식의 표현을 썼고
어떤 분은 쿵푸가 연상 된다고 하셨는데 어찌보면 고차원 추상 철학이 연상되었을 지 모르나, 사실은 의미를 풀어 얘기하고 과학적으로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는 행위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 또 뵙겠습니다.
-출처 클리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