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라는 것에 대한 팁과 기초적 원리
공부 잘하는 사람은 적지만 동시에 넘쳐 납니다.
왜냐면 공부잘한다는 표현은 나를 중심으로 본
상대적 표현일 뿐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절대 인구는 상당히 많죠.
제가 공부라는 대주제를 정통한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지만
많은 고통을 겪어본 바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고통을 겪고 당신의 상황과 얼마나 비슷한지 저의 당시의 조건 상황을 설명하기보다
글에서 독자 자신이 공감하면 그걸로 충분하기에 생략하겠습니다.
저와 비슷한 조건의 사람들이 고군분투를 제가 과거에 겪은 만큼 하고 있다면 그런 분들을 위해서 씁니다.
공부는 경쟁의 관점, 다시 말해, 한정된 자원을 뺏고 빼앗기는 것처럼 파악해 접근하는, 사실 대다수가 가진 잘못된 관점으로는 깊게 못합니다.
이 관점을 탈피하는 철학은 너무 기니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고 필요한 것을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공부는 필연적으로 나와 외부세상의 바른 관계정립에서 옵니다.
게시판에 많이 보이는 약자와 강자식만으로 파악한 관점으로는 바른 공부를 할수 없으며
바르게 스스로 이 관계를 통찰하시길 바랍니다. 이에 대한 실마리는 아래의 글에서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이는 경쟁을 도외시 하라는 말이 아니라
나와 내 현재 이해수준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고,
이에 따라 설정한 공부 이해의 기준점을 정하며,
언제나 나의 인식 현재 상태를 자각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통찰에서 옵니다.
경쟁은 이와같은 원인이 전개될때 단지 부수적인 차원이 펼쳐졌을때 보이는 부차물로 보아야 합니다.
이 현상을 올바르게 활용해야지, 이 현상을 공부라는 주제의 중심으로 보거나 혹은 이에 매몰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공부는 필연적으로 남이 주제대상을 설명한 것을 해석하는 식으로 내 인식에 옵니다.
아무리 객관적이라도, 사실 그래봤자 타인의 이해 수준이 반영되어 있기에
내가 그 설명을 인정할수 있든 없든 초심자인 우리는 잘 못 알아듣기 쉽습니다.
왜냐면 그걸 검토한 사람들은 이미 그 지식에 정통했기에 초심자의 관점을 놓치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제 내 이해수준과 설명자의 이해 수준 간극이 작용하죠.
우리는 이때 다급해지며 우리의 인식 수준을 부끄러워 부정하거나 허겁지겁 흘리듯이 지식을 흡수하며 극복하려는 마음이 앞섭니다. 이걸 저는 이제 자신의 "페이스"를 조절하지 못한다고 표현하겠습니다.
내가 이해하는 것과 남이 이해한 방법이나 수단, 매체는 다릅니다. 공부의.대상 주제는 같지만 언제나 깊은 이해는 삶에서 내가 경험한 것과 비교해서 타당한지 라는 사고를 거칠 때 옵니다. 이는 나와 나의 경험들이 가진 고유성에 대한 인정 및 자각이 있어야 하며 스스로에게 친절하며, 투명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이를 동의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냥 암기를 이해로 착각하고 있지 않은지 자문해봐야 합니다.
지식 이해만 남게 되며 더이상 경쟁의 관점에서 공부를 대하지 않는 마음 평온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경쟁은 어떻게 봐야할까요? 도외시 하면 안되되,
현재 자신의 공부 방향 진단등 전략에 ㅡ 즉 나와 이 지식의 이해만 있는 우주에서 이게 지금 바른 방향인가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방향 나침반으로서 봐야 합니다. 이는 상당히 현명하며 나의 공부 계획이나 수단, 목적등이 바른가를 확인하는 지표로 잘 활용해야 합니다. 이는 세상 모든 것은 한정되어 있기에 중요하며, 아무리 호기심이 숭상되는 사회라도 이러한 좋은 특질이 허울 좋게 공부에 작용해 길을 잃게 하는 작용또한 필연적으로 낳기에,
타인과의 경쟁을 바른 견제 방향으로 쓴다면 좋기 때문입니다.
시험에서 당락과 패자 승자가 갈리는 절체절명의 시험일수록 이런, 사회에서 작용한 무의식적으로 우리 의식이 결국 수렴하는 경쟁과 약육강식의 논리만으로서의 시험이 아닌, 오히려 시험은 부차적이며 내가 이 지식이나 목적과 무슨 관계를 맺었는지가 큰 방향을 결정한다는 사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공부를 고행으로 참고 넘기는 대상으로 대하는 문화현상은, 특히나 경쟁 중심 사회인 우리 집단 문화에서 뿌리깊습니다.
이는 당연한데, 고통의 존재를 증명하면 결과 회피 및 합리화에 유리한 사회적 시그널이되어 사회적유인을 주기때문입니다.
이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형식으로서의 보여주기식 공부로 집단 발현되어 나타나며, 나 이정도면 고생했지라는 타인의 시선을
얻기 위한 보상심리를 자극합니다..
이런 가학성이라는 주제에 무의식적으로 묶여 "나는 공부한다"를 합리화하는 기제에 대해서 극도의 투명함을 가지고 자각해야 합니다.
공부 그 자체를 고행화하는 사람이 우리 주변 대다수라는 것을 자각한다면 당신은 현명합니다.
공부세계의 초보라면 위의 말을 상기하고 언제나 그런 부분이 있지 않은지 찾아보고 개선해야 합니다.
반대로,내가 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식으로 공부의 수단과 방법이 편향되었거나
그 수단이 사실 그 자체가 재밌어서 목적을이루는데 적합한지 따지지 않아 허겁지겁
불안감 해소로 전락하는 행위도 또한 경계해야 합니다.
공부를 할때는 중요한 검증해야 할 요소가 있습니다.
현재 내가 보이는 퍼포먼스가
목적 달성 수준과 비교해 거리가 멀다면, "하기 싫은 일을 빠뜨리는 등, 아직 그 목적 달성에 필여한 '그걸' 하는 결의를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점검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공부는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목적 달성에 대해서
왜냐면 공부잘한다는 표현은 나를 중심으로 본
상대적 표현일 뿐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절대 인구는 상당히 많죠.
제가 공부라는 대주제를 정통한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지만
많은 고통을 겪어본 바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고통을 겪고 당신의 상황과 얼마나 비슷한지 저의 당시의 조건 상황을 설명하기보다
글에서 독자 자신이 공감하면 그걸로 충분하기에 생략하겠습니다.
저와 비슷한 조건의 사람들이 고군분투를 제가 과거에 겪은 만큼 하고 있다면 그런 분들을 위해서 씁니다.
공부는 경쟁의 관점, 다시 말해, 한정된 자원을 뺏고 빼앗기는 것처럼 파악해 접근하는, 사실 대다수가 가진 잘못된 관점으로는 깊게 못합니다.
이 관점을 탈피하는 철학은 너무 기니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고 필요한 것을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공부는 필연적으로 나와 외부세상의 바른 관계정립에서 옵니다.
게시판에 많이 보이는 약자와 강자식만으로 파악한 관점으로는 바른 공부를 할수 없으며
바르게 스스로 이 관계를 통찰하시길 바랍니다. 이에 대한 실마리는 아래의 글에서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1. 공부는 본질은 나 자신의 지평을 여는 것이지 타인들과의 경쟁 게임이 전혀 아니다.
뚱딴지 같은 소리죠? 더 풀어서 설명해보죠.이는 경쟁을 도외시 하라는 말이 아니라
나와 내 현재 이해수준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고,
이에 따라 설정한 공부 이해의 기준점을 정하며,
언제나 나의 인식 현재 상태를 자각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통찰에서 옵니다.
경쟁은 이와같은 원인이 전개될때 단지 부수적인 차원이 펼쳐졌을때 보이는 부차물로 보아야 합니다.
이 현상을 올바르게 활용해야지, 이 현상을 공부라는 주제의 중심으로 보거나 혹은 이에 매몰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공부는 경쟁이 중심 주제가 아니다#####
공부는, 이에 동의하든 안 하든, 작용 자체로 보면 나와 인식대상 개념의 마주함에서 원인결과가 형성되는 현상일 뿐입니다.공부는 필연적으로 남이 주제대상을 설명한 것을 해석하는 식으로 내 인식에 옵니다.
아무리 객관적이라도, 사실 그래봤자 타인의 이해 수준이 반영되어 있기에
내가 그 설명을 인정할수 있든 없든 초심자인 우리는 잘 못 알아듣기 쉽습니다.
왜냐면 그걸 검토한 사람들은 이미 그 지식에 정통했기에 초심자의 관점을 놓치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제 내 이해수준과 설명자의 이해 수준 간극이 작용하죠.
우리는 이때 다급해지며 우리의 인식 수준을 부끄러워 부정하거나 허겁지겁 흘리듯이 지식을 흡수하며 극복하려는 마음이 앞섭니다. 이걸 저는 이제 자신의 "페이스"를 조절하지 못한다고 표현하겠습니다.
내가 이해하는 것과 남이 이해한 방법이나 수단, 매체는 다릅니다. 공부의.대상 주제는 같지만 언제나 깊은 이해는 삶에서 내가 경험한 것과 비교해서 타당한지 라는 사고를 거칠 때 옵니다. 이는 나와 나의 경험들이 가진 고유성에 대한 인정 및 자각이 있어야 하며 스스로에게 친절하며, 투명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이를 동의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냥 암기를 이해로 착각하고 있지 않은지 자문해봐야 합니다.
###언제나 깊은 이해를 추구해야 합니다. ###
이렇게 깊은 이해가 선행될때 당신은 마치 너바나처럼 이 주제대상이 개념과 언어로 모사하려한 원본에 해당하는 것의지식 이해만 남게 되며 더이상 경쟁의 관점에서 공부를 대하지 않는 마음 평온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경쟁은 어떻게 봐야할까요? 도외시 하면 안되되,
현재 자신의 공부 방향 진단등 전략에 ㅡ 즉 나와 이 지식의 이해만 있는 우주에서 이게 지금 바른 방향인가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방향 나침반으로서 봐야 합니다. 이는 상당히 현명하며 나의 공부 계획이나 수단, 목적등이 바른가를 확인하는 지표로 잘 활용해야 합니다. 이는 세상 모든 것은 한정되어 있기에 중요하며, 아무리 호기심이 숭상되는 사회라도 이러한 좋은 특질이 허울 좋게 공부에 작용해 길을 잃게 하는 작용또한 필연적으로 낳기에,
타인과의 경쟁을 바른 견제 방향으로 쓴다면 좋기 때문입니다.
시험에서 당락과 패자 승자가 갈리는 절체절명의 시험일수록 이런, 사회에서 작용한 무의식적으로 우리 의식이 결국 수렴하는 경쟁과 약육강식의 논리만으로서의 시험이 아닌, 오히려 시험은 부차적이며 내가 이 지식이나 목적과 무슨 관계를 맺었는지가 큰 방향을 결정한다는 사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공부는 어려운 것인가 쉬운 것인가?
공부를 고행으로 참고 넘기는 대상으로 대하는 문화현상은, 특히나 경쟁 중심 사회인 우리 집단 문화에서 뿌리깊습니다.
이는 당연한데, 고통의 존재를 증명하면 결과 회피 및 합리화에 유리한 사회적 시그널이되어 사회적유인을 주기때문입니다.
이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형식으로서의 보여주기식 공부로 집단 발현되어 나타나며, 나 이정도면 고생했지라는 타인의 시선을
얻기 위한 보상심리를 자극합니다..
이런 가학성이라는 주제에 무의식적으로 묶여 "나는 공부한다"를 합리화하는 기제에 대해서 극도의 투명함을 가지고 자각해야 합니다.
공부 그 자체를 고행화하는 사람이 우리 주변 대다수라는 것을 자각한다면 당신은 현명합니다.
공부세계의 초보라면 위의 말을 상기하고 언제나 그런 부분이 있지 않은지 찾아보고 개선해야 합니다.
반대로,내가 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식으로 공부의 수단과 방법이 편향되었거나
그 수단이 사실 그 자체가 재밌어서 목적을이루는데 적합한지 따지지 않아 허겁지겁
불안감 해소로 전락하는 행위도 또한 경계해야 합니다.
공부를 할때는 중요한 검증해야 할 요소가 있습니다.
현재 내가 보이는 퍼포먼스가
목적 달성 수준과 비교해 거리가 멀다면, "하기 싫은 일을 빠뜨리는 등, 아직 그 목적 달성에 필여한 '그걸' 하는 결의를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점검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공부는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목적 달성에 대해서
1. 피하고 싶더라도 해야 하는 행위,
2. 스스로 투명하게 질문하면 합당히 그걸 해야 한다고
도출되는 "그것"이며,
"그걸" 하려는데 적응 시간이 필요하다라는 점에서 어렵습니다.
즉 쉽게 한마디로 "우주와 삶의 궁극 목적은 행위를 통한 합치로 완성을 이루는 것" 이라는 비유로 들 수 있으며
학습 또한, 해야 하는 행위를, 싫어도 합목적성에 따라 고찰 결과 타당함이
밝혀지면 그 행위를 하도록 스스로를 이끌어가며 이뤄가는 능동적 과정입니다.
위의 조건이 만족된다면 공부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야 합니다. 언제나 공부가 머리가 터질 것 같거나 목에 근육이 스트레스로 협소해져서 목졸릴듯 혈관이 수축한, 혹은 뱃속 욱하는 분노가 육체화된 스트레스가 크게 느껴진다면 잘못된 방법을 쓰지 않는지 의심해야 합니다. 여기서 잘못된 방법은 그 공부를 포기하라는 게 아닌 그 접근법이 틀렸다라는 뜻임에 주의하세요. 잘못된 방법은 ㅡ
2. 스스로 투명하게 질문하면 합당히 그걸 해야 한다고
도출되는 "그것"이며,
"그걸" 하려는데 적응 시간이 필요하다라는 점에서 어렵습니다.
즉 쉽게 한마디로 "우주와 삶의 궁극 목적은 행위를 통한 합치로 완성을 이루는 것" 이라는 비유로 들 수 있으며
학습 또한, 해야 하는 행위를, 싫어도 합목적성에 따라 고찰 결과 타당함이
밝혀지면 그 행위를 하도록 스스로를 이끌어가며 이뤄가는 능동적 과정입니다.
위의 조건이 만족된다면 공부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야 합니다. 언제나 공부가 머리가 터질 것 같거나 목에 근육이 스트레스로 협소해져서 목졸릴듯 혈관이 수축한, 혹은 뱃속 욱하는 분노가 육체화된 스트레스가 크게 느껴진다면 잘못된 방법을 쓰지 않는지 의심해야 합니다. 여기서 잘못된 방법은 그 공부를 포기하라는 게 아닌 그 접근법이 틀렸다라는 뜻임에 주의하세요. 잘못된 방법은 ㅡ
1. 잘못된 공부 수단이나 매체(여기에는 공부의 대상을 자신이 이 목적 전에 이뤄왔던 다른 대상에 쓰던 익숙한 방법을 이용, 환원해서 공부법을 만든 것을 포함하는 오류가 많습니다 즉 자신이 익숙하게 행위하던대로 프로세스를 만들고 지금의 새로운 인식대상을 여기에 맞추려는 것이며 이것이 가장 보편적 오류입니다.),
2. 잘못된 수준
이렇게 두가지로 나뉘며 자각을 못하기 쉽지만 너무 고통스러운 느낌이 난다면, 혹은 고통을 부정하려고 하고 익숙한 대로,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는 자신만이 보인다면, 그걸 신호로 파악해 판별 가능합니다.
왜 그렇게 크게 고통스럽지 않은가 하면
언제나 자기 수준 중심으로 이해를 할때 비로소 공부가 이뤄지기 때문이며 이때 앎이 생기며 고통이 많이 사라지는게 바른 공부의 특징입니다. 혹시 cramming즉 그냥 막무가내식 암기를 이해로 착각하지는.않은지, 불필요한 것으로 검증 판명날 행위를 복잡하게 해서 나는 역시 고통스럽게 공부한다,나는 역시 노력중이야 라는, 허위로 사회가 강요하고 우리가 최면당한 강박에 놀아나서 합리화에 빠지진 않았는지, 위에 제가 지적하며 한번썼던 표현을 다시 생각해봅시다.
공부의 나 자신이 아는 나의 인생 상의 연결된 큰 의미를 알아야 하며, 자기 자신의 행동과 인지 습성, 호불호 습성등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는 공부 방법에서도 반영해서 자신의 현재 수준에 맞게 자신을 친절히 이끄는 수련을 하듯 자신에게 맞는 커리큘럼과 계획을 짜야 하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현재에서 이끈다는 것과 이는 프랙탈 같다는 말이 포인트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글에서 더 깊게 설명하겠습니다.
또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
이렇게 두가지로 나뉘며 자각을 못하기 쉽지만 너무 고통스러운 느낌이 난다면, 혹은 고통을 부정하려고 하고 익숙한 대로,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는 자신만이 보인다면, 그걸 신호로 파악해 판별 가능합니다.
왜 그렇게 크게 고통스럽지 않은가 하면
언제나 자기 수준 중심으로 이해를 할때 비로소 공부가 이뤄지기 때문이며 이때 앎이 생기며 고통이 많이 사라지는게 바른 공부의 특징입니다. 혹시 cramming즉 그냥 막무가내식 암기를 이해로 착각하지는.않은지, 불필요한 것으로 검증 판명날 행위를 복잡하게 해서 나는 역시 고통스럽게 공부한다,나는 역시 노력중이야 라는, 허위로 사회가 강요하고 우리가 최면당한 강박에 놀아나서 합리화에 빠지진 않았는지, 위에 제가 지적하며 한번썼던 표현을 다시 생각해봅시다.
3. 공부란 인생 전체의 의미적 관점에 나를 이끄는 과정이어야 하며 이는 공부 방법에도 프랙탈 처럼 반영되어야 한다.
위에 설명한 것에 나오죠? 언제나 자신이 이해할수 있고 자신의 페이스pace대로 해야 함을 강조했죠? 이번 3항에서도 이를 다시 강조합니다.공부의 나 자신이 아는 나의 인생 상의 연결된 큰 의미를 알아야 하며, 자기 자신의 행동과 인지 습성, 호불호 습성등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는 공부 방법에서도 반영해서 자신의 현재 수준에 맞게 자신을 친절히 이끄는 수련을 하듯 자신에게 맞는 커리큘럼과 계획을 짜야 하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현재에서 이끈다는 것과 이는 프랙탈 같다는 말이 포인트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글에서 더 깊게 설명하겠습니다.
또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
-출처 클리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