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라는 것에 대한 팁과 기초적 원리 2번째
두번째 글입니다.
첫번째 글이 제 예상과 달리 너무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적당히 부담감을 느껴 미루게되었습니다만 제가 판단하기에 중요한 것들을 쓰는 식으로 연재해나가겠습니다.
저번 글에서 서두에 밝힌 것과 마찬가지로 저는 공부의 달인과 거리가 멉니다만,
저의 낮은 수준에서 그보다는 조금 한단계 더 오르는데 실전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시각을 공유한다면 그것으로 족하기에 저의 어려웠던 분투하던 당시 그 때의 수준에 맞춰 글을 씁니다.
첫번째 글이 제 예상과 달리 너무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적당히 부담감을 느껴 미루게되었습니다만 제가 판단하기에 중요한 것들을 쓰는 식으로 연재해나가겠습니다.
저번 글에서 서두에 밝힌 것과 마찬가지로 저는 공부의 달인과 거리가 멉니다만,
저의 낮은 수준에서 그보다는 조금 한단계 더 오르는데 실전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시각을 공유한다면 그것으로 족하기에 저의 어려웠던 분투하던 당시 그 때의 수준에 맞춰 글을 씁니다.
공부란 것은 뭘까요?
삶의 의미가 여러가지듯 이 공부라는
단어 개념 또한 우리 마음 속에 양상이 여러가지가 있을 겁니다.
예비군에서 오늘 지금 들은 것을
테스트하는 시험 쪼가리를 1분 정도 읽어보는 행위,
즉, 이토록 짧은 테스트를 위한 학습도 공부이고
나와 우주적 외부세계의 관계성을 의미를 자각한 것을 바탕으로
위의 예비군 시험이 아닌 내 인생 차원의 어떤 프로젝트
즉, 예로 사업을 위해 관련된 일련의 행위를 디자인 하는 것 또한 공부입니다.
또한 이와 달리 노가다 라고 비하되는 시험지 없는 실전 지식의 세계에서도 사실 꽤 고등교육 공부와
다르지 않은 난이도의 건설 공학 지식ㅡ 3차원 각도와 어느정도 머리를 굴려야 이해되는 ㅡ
개념도 있고 실전에 맞닿아 있습니다. 이는 첫번째 테스트와 전혀 다르게 실전입니다.
이 또한 공부입니다.
독자 분의 공부라는 말은 개념상 위의 셋 중 뭐에 해당합니까?
많은 분들이 첫번째 글을 보면서 제가 위의 셋을 들며 개념 설명 시도를 한 것, 즉 공부란 것의 정의 명확화를
하지 않았기에 이를 놓쳤을 겁니다. 사실 각자가 본 공부라는 개념이 투명하게 반영된 것이고 각자의 의미 타게팅 양상, 수준이 드러납니다.
이를 잘 자각하시길 바랍니다. 공부를 단지 첫번째로 이해했다면 그 독자분은 너무
협소한 개념에서 저의 글을 읽은 것이고
더욱 확장된 개념 대상으로서의 공부에 대한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의 글은 두번째 대상 주제로서의 공부의 의미를 탐구해야 하는
절박한 분들을 위한 것임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가 말하는 공부는 위의 셋 대상 중 두번째에 집중한 것이고
세번째로(실전) 전개되어 첫번째에 해당하는 것은 공부라는 단어가 담는
의미 차원이 최소로 축소된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셋의 분별 대상의 차이는 단지 잘난척이나 수준이 높다 라서 별개가 아닌
상위함수(수퍼셋)즉 집합 개념에서 상위 집합으로 이해해야합니다..
수퍼셋이란 수학의 집합에서 하위 집합을 포괄한다는 측면에서 제가 수퍼셋이라고
명칭을 붙인 것입니다.
왜냐면 상위가 만족되면 하위는 자동으로 충족되는 식으로 이어진 차원이기에
저 셋의 관계를 설명하겠습니다.
공부라는 이름으로 행위를 묘사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두번째에 해당하는 깊은 상위차원의 의미인
나와 이 공부 대상간의 시간 공간적 의미 자각이 먼저 바르게 세워졌고
이를 바탕으로 심화된 학습인 세번째(실전에서 통용핳
수준으로 복잡한 개념 이해) 행위가 바르게 세워질 기틀이 세워지며,
첫번째 예로 들었던 예비군 훈련 같은 테스트를 더욱 잘 할수 있게 됩니다.
왜 셋은 이어진 것일까요?
이는 인간은 의미 이해의 노예이자 동시에 이해의 황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내면의 의미 이해와 목적 세움, 외부와의 관계 설정에 따라
마음과 외부세계와 이어진 활동의.양상이 민감하게 양상을 바꿉니다.
셋은 조건과 순서가 있는 관계를.맺은 것이지 각각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미 세움이라는 것이 부실하거나 비자각된 상태라면 테스트 결과 또한 부실하게 나옵니다.
내가 지금 공부라는 행위가 내.인생 나의 자아와 외부세계를 조절하는 의미가
강력하다면 바른 조건이 세워지기 쉽습니다. 이는 나 ㅡ 외부세계의 최종 목적물 및 갈구 목표 ㅡ
공부대상과 공부의 인과적 의미 ㅡ 셋이
일치함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일치성은 이렇듯 내 마음ㅡ나를 중심으로 내부 외부가 같은 방향으로 모순성이
마음이나 행동에 있지 않은지 자각력이 필요합니다.
공부의 최종 목적은 이를 통해 어떤 결과에 도달하기 위함입니다.
이때 목적과 내 행위와 그.행위 뒤의 마음에 모순되는 것이 있는지 자각력이 없다면
여러 모순되는.요인으로 인해서 함수는 잘못된 값을 도출하게 되듯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위 또한 여러 행위가 잘못된 세팅이 된 건설 모듈들 처럼
되어 엉터리 결과를 낳는 것에 비유할수 있습니다.
감상적인 단어가 아닌, 여기서의 친절성은 인과적 관계에 깨어 맞닿아 있어서 나온
친절성만 의미합니다. 또한 목적 적합성을 따져서 행위를 자각하는 의식에서 나온 친절성에 한정된 것입니다.
즉 제가 말하는 친절이라는 것은 감상적인 흔히 표현하는 친절이 아님에 유의하세요.
인괴적으로 세상에서 가능성들의 모든 집합을 볼때
내가 실수를 했다면,
그런 실수가 나온 조건과 문맥이 얼마나 개연성이 있는 세팅인지,
여기서 그 실수 등이 나온 인과적 과학성에 기반해서 개연성을 봅니다.
그리고 나의 실수가 확률적으로 왜 그렇게 나온것인지 외부 문맥등을 고려하면
실수 또한 과학적 인과에 의해 이뤄졌음을 그제서야 자각합니다. 그에 기반해서 자아적 반사작용인 자책이나 실수를 부정하려는 의식 두개에서 깨어납니다.
언제나 우리는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의 의미가 주체적으로 세워져서 우리가 따르는 중이라면, 즉, 남이 집단 군중을 위해
떠먹여 주지 않은 것이라면 주체성이 요구되는 행위기에
시행착오가 많이 있습니다.
이때 위 설명에서 나온 이러한 과학적 문맥 ㅡ 나의 의미 고찰을 통한 자각을 친절성이라고 다소 감상적인 단어로 표현한 것이며,
위의 행위는 단어의 감상적 느낌과 반대로 오히려 객관성을 낳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부를 경쟁으로 보고, 나의 무능력을 상기하는 대상으로 생각하며
회피본능이 있기에 위의 작용이 없고
반사신경적으로 합리화 정당화 고리에 빠진 상태입니다.
혹은 자기 비난이 나오죠.
이 덫에 걸려있기에
이러한 잘못된 행위를 자연현상처럼 객관화 ㅡ 멀리 떨어져 판단하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즉 위의.친절성이라는 단어는 단어 모양만 친절성이며
실은 즉 바른 자각 및 인정 행위를 의미한 단어 입니다.
명심하세요, 흔히 친절성은 잘못된, 감상적으로 자기를 옹호하는 식으로 펼쳐지기 쉬우나 위의 단어는 사실은 냉혹한 외부 환경을 인식하고
그에 대응하는 이끎을 주는.조정자로서의,
냉혹할 정도로 자기에 대해서도 객관화된 시각이 존재하는 친절입니다.
이는 목표 지향적이지만 우리가 아는 그 친절의 요소가 있기에 친절이라는
단어로 묘사합니다.
댓글에서 논하기로 약속한 것들이 논해지지 않은 게 많습니다만
다음 편에서 다시 또 뵙겠습니다.
단어 개념 또한 우리 마음 속에 양상이 여러가지가 있을 겁니다.
예비군에서 오늘 지금 들은 것을
테스트하는 시험 쪼가리를 1분 정도 읽어보는 행위,
즉, 이토록 짧은 테스트를 위한 학습도 공부이고
나와 우주적 외부세계의 관계성을 의미를 자각한 것을 바탕으로
위의 예비군 시험이 아닌 내 인생 차원의 어떤 프로젝트
즉, 예로 사업을 위해 관련된 일련의 행위를 디자인 하는 것 또한 공부입니다.
또한 이와 달리 노가다 라고 비하되는 시험지 없는 실전 지식의 세계에서도 사실 꽤 고등교육 공부와
다르지 않은 난이도의 건설 공학 지식ㅡ 3차원 각도와 어느정도 머리를 굴려야 이해되는 ㅡ
개념도 있고 실전에 맞닿아 있습니다. 이는 첫번째 테스트와 전혀 다르게 실전입니다.
이 또한 공부입니다.
독자 분의 공부라는 말은 개념상 위의 셋 중 뭐에 해당합니까?
많은 분들이 첫번째 글을 보면서 제가 위의 셋을 들며 개념 설명 시도를 한 것, 즉 공부란 것의 정의 명확화를
하지 않았기에 이를 놓쳤을 겁니다. 사실 각자가 본 공부라는 개념이 투명하게 반영된 것이고 각자의 의미 타게팅 양상, 수준이 드러납니다.
이를 잘 자각하시길 바랍니다. 공부를 단지 첫번째로 이해했다면 그 독자분은 너무
협소한 개념에서 저의 글을 읽은 것이고
더욱 확장된 개념 대상으로서의 공부에 대한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의 글은 두번째 대상 주제로서의 공부의 의미를 탐구해야 하는
절박한 분들을 위한 것임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가 말하는 공부는 위의 셋 대상 중 두번째에 집중한 것이고
세번째로(실전) 전개되어 첫번째에 해당하는 것은 공부라는 단어가 담는
의미 차원이 최소로 축소된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셋의 분별 대상의 차이는 단지 잘난척이나 수준이 높다 라서 별개가 아닌
상위함수(수퍼셋)즉 집합 개념에서 상위 집합으로 이해해야합니다..
수퍼셋이란 수학의 집합에서 하위 집합을 포괄한다는 측면에서 제가 수퍼셋이라고
명칭을 붙인 것입니다.
왜냐면 상위가 만족되면 하위는 자동으로 충족되는 식으로 이어진 차원이기에
저 셋의 관계를 설명하겠습니다.
공부라는 이름으로 행위를 묘사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두번째에 해당하는 깊은 상위차원의 의미인
나와 이 공부 대상간의 시간 공간적 의미 자각이 먼저 바르게 세워졌고
이를 바탕으로 심화된 학습인 세번째(실전에서 통용핳
수준으로 복잡한 개념 이해) 행위가 바르게 세워질 기틀이 세워지며,
첫번째 예로 들었던 예비군 훈련 같은 테스트를 더욱 잘 할수 있게 됩니다.
왜 셋은 이어진 것일까요?
이는 인간은 의미 이해의 노예이자 동시에 이해의 황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내면의 의미 이해와 목적 세움, 외부와의 관계 설정에 따라
마음과 외부세계와 이어진 활동의.양상이 민감하게 양상을 바꿉니다.
셋은 조건과 순서가 있는 관계를.맺은 것이지 각각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미 세움이라는 것이 부실하거나 비자각된 상태라면 테스트 결과 또한 부실하게 나옵니다.
1. 일치성
위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일치성이라는 주제어로 묶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내가 지금 공부라는 행위가 내.인생 나의 자아와 외부세계를 조절하는 의미가
강력하다면 바른 조건이 세워지기 쉽습니다. 이는 나 ㅡ 외부세계의 최종 목적물 및 갈구 목표 ㅡ
공부대상과 공부의 인과적 의미 ㅡ 셋이
일치함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일치성은 이렇듯 내 마음ㅡ나를 중심으로 내부 외부가 같은 방향으로 모순성이
마음이나 행동에 있지 않은지 자각력이 필요합니다.
공부의 최종 목적은 이를 통해 어떤 결과에 도달하기 위함입니다.
이때 목적과 내 행위와 그.행위 뒤의 마음에 모순되는 것이 있는지 자각력이 없다면
여러 모순되는.요인으로 인해서 함수는 잘못된 값을 도출하게 되듯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위 또한 여러 행위가 잘못된 세팅이 된 건설 모듈들 처럼
되어 엉터리 결과를 낳는 것에 비유할수 있습니다.
2. 친절성
감상적인 단어가 아닌, 여기서의 친절성은 인과적 관계에 깨어 맞닿아 있어서 나온친절성만 의미합니다. 또한 목적 적합성을 따져서 행위를 자각하는 의식에서 나온 친절성에 한정된 것입니다.
즉 제가 말하는 친절이라는 것은 감상적인 흔히 표현하는 친절이 아님에 유의하세요.
인괴적으로 세상에서 가능성들의 모든 집합을 볼때
내가 실수를 했다면,
그런 실수가 나온 조건과 문맥이 얼마나 개연성이 있는 세팅인지,
여기서 그 실수 등이 나온 인과적 과학성에 기반해서 개연성을 봅니다.
그리고 나의 실수가 확률적으로 왜 그렇게 나온것인지 외부 문맥등을 고려하면
실수 또한 과학적 인과에 의해 이뤄졌음을 그제서야 자각합니다. 그에 기반해서 자아적 반사작용인 자책이나 실수를 부정하려는 의식 두개에서 깨어납니다.
언제나 우리는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의 의미가 주체적으로 세워져서 우리가 따르는 중이라면, 즉, 남이 집단 군중을 위해
떠먹여 주지 않은 것이라면 주체성이 요구되는 행위기에
시행착오가 많이 있습니다.
이때 위 설명에서 나온 이러한 과학적 문맥 ㅡ 나의 의미 고찰을 통한 자각을 친절성이라고 다소 감상적인 단어로 표현한 것이며,
위의 행위는 단어의 감상적 느낌과 반대로 오히려 객관성을 낳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부를 경쟁으로 보고, 나의 무능력을 상기하는 대상으로 생각하며
회피본능이 있기에 위의 작용이 없고
반사신경적으로 합리화 정당화 고리에 빠진 상태입니다.
혹은 자기 비난이 나오죠.
이 덫에 걸려있기에
이러한 잘못된 행위를 자연현상처럼 객관화 ㅡ 멀리 떨어져 판단하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즉 위의.친절성이라는 단어는 단어 모양만 친절성이며
실은 즉 바른 자각 및 인정 행위를 의미한 단어 입니다.
명심하세요, 흔히 친절성은 잘못된, 감상적으로 자기를 옹호하는 식으로 펼쳐지기 쉬우나 위의 단어는 사실은 냉혹한 외부 환경을 인식하고
그에 대응하는 이끎을 주는.조정자로서의,
냉혹할 정도로 자기에 대해서도 객관화된 시각이 존재하는 친절입니다.
이는 목표 지향적이지만 우리가 아는 그 친절의 요소가 있기에 친절이라는
단어로 묘사합니다.
댓글에서 논하기로 약속한 것들이 논해지지 않은 게 많습니다만
다음 편에서 다시 또 뵙겠습니다.
-출처 클리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