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작문기법 정리글
낯설게 하기 : 소설의 제 1원칙 「낯설게 하기에 위배되어서는 안 된다.」
흔히 소설에 대해 잘 쓰는 방법이라 하면 많이 읽는 것(多讀), 많이 쓰는 것(多作), 많이 생각하는 것(多想)을 떠올린다.
그건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옳다. 다만 그것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위의 보편적인 사실들은 '소설을 잘 쓰는 방법들'에 해당한다. 모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소설을 잘 쓰는 것은 작가가 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소설을 잘 쓰는데 작가는 될 수 없다니.
결과만 이야기하면, 거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렇다. 그렇다면 왜?
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누구를 위한 글을 쓰고 있는가. 독자들? 그 대답은 반만 옳다. 우리가 전제하는 대상은 불특정 다수가
아니다. 아주 소수의 고급 독자, 심사위원들이 소설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대부분 학계에 영향력이 있는 교수거나, 기성 작가,
문학 평론가들이다. 그들을 대상으로 한 소설이 본선을 거쳐 신인상에 당선되면 우리는 작가가 될 수 있는 기회'만' 얻는다.
여기에도 모순이 있다. 해마다 탄생하는 신인작가의 수는 대략 40명 전후. 그렇다면 그 신인작가들은 다 어디로 가는가?
보자, <우리나라의 작가들>의 이름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적게는 몇 명, 많게는 몇 십 명 정도를 떠올릴 수 있다.
(대게는 열 명 안팎일 것이다. 우리가 소설을 즐겨 읽는 정도의 일반 시민이라면.)
여기에 대한 대답을 이야기하면, 그들은 사라진다. 포기했기 때문이다. 단편 소설집을 한 권 출간하기 위해서는 7-9매 정도의
단편소설이 있어야 하는데 그 소설들은 당연히 검토되고 검토된, 완성도가 높은 소설들이다. 그렇게 소설책을 출간하면 비로소
'작가' 라는 이름을 얻는다. 대게의 신인작가는 등단작이 마지막 작품이 되기 때문에 작가가 되지 못하고 사라지고 만다.
본편으로 들어와서, 순수문학을 전공하는 경우에(장르문학이나, 웹소설을 쓰는 경우[문피아, 조아라 등]를 제외한) 우리 소설의
독자는 심사위원이다. 보통 공모전과 관련해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대부분 첫 장만 읽고 버려진다.'는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위 이야기는 사실이다(물론 직접 겪었거나, 눈으로 보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심사위원들이 읽는 소설의 수는 셀 수도 없다. 그들은 국내의 작가들은 물론, 해외의 작가들에 대해서도 정통하다. 그들에게 대부분의
투고된 소설들은 고만고만한 아마추어들의 소설일 뿐이다. 우리는 '아무리 그래도 첫 장만 보고 던지는 건 너무한 게 아니냐.'고
주장할 수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소설들은 첫 장만 읽어도 알 수 있다. 소설의 완성도란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문학에서 클리셰는 아주 중요한 용어다. 클리셰(clicher)는 판을 뜨다는 프랑스어에서 파생된 문학 용어인데, 붕어빵을 만드는 주조 틀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판에 박힌, 진부한 등의 의미로 쓰이는데 예를 들면 '대부분의 추리 소설에서 형사'가 그에 해당한다.
만약 당신이 추리 소설을 쓰고 있고, 경찰이 등장한다면, 아마 클리셰를 파괴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경찰은 강력계 소속이고,
아마 결혼해서 자녀가 있고, 불같은 성격에, 힘을 깨나 쓰고, 월급은 박봉에…… 하여간 이런 것들이다. 굳이 조사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 덧붙여서 욕도 찰지게 하고. 이런 것들은 몽땅 클리셰라고 할 수 있다. 심사위원들이 소설을 던지게 되는 이유에 해당한다.
이러한 클리셰를 피하기 위한 수단이 '낯설게하기'인데, 여기에는 몇 가지 세부적인 방법들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소설을 낯설게 만들 수 있는가. 굳이 이런 표현을 쓰지 않아도 좋다. 뻔하디 뻔한 소설을 읽고 싶은가?
제목만 봐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고, 식상한 전개에 생각했던 결말이 전부인 그런 소설들을? 결국 등단을 한다는 것, 작가가 된다는 것은
소설을 낯설게 만드는 것과의 싸움이다. 이것이 1순위다. 문장력이나 문체, 배치, 구성, 플롯, 서사, 개연성, 인물, 사건…… 이런 모든
잡다한 것들은 2순위에서 그친다. 문체가 엉망이어도 좋고 문장력이 나빠도 좋다. 배치가 엉망이어도 좋다. 개연성이 부족해도,
인물이 평범해도, 사건이 고만고만해도 좋다. 일단은 낯설게만 만들면 된다.
소설을 낯설게 만든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궁금하게 만든다는 것이고,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것이니까. 그렇다고 첫 문장을
자극적으로 만들라는 것은 아니다. 그건 소설을 낯설게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눈을 떴을 때는 어머니를 죽인 후였다. 팔이 덜덜 떨렸다. 입술이 내 의사와는 상관 없이 부딪혔다. 실수로 떨어뜨린 식칼이 어머니의 팔에
박혔다. 칼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살을 파고들었다. 어머니는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나는 식칼을
뺐다. 살을 베고 올라오는 감촉이 팔 위를 내달렸다. 그때야 나는 비로소 인지했다. 어머니를 죽였다.
위의 항목은 아주 끔찍한 문장을 예로 든 것이다. 아마 저런 도입부로 소설을 써서 투고한다면 첫 장도 넘기지 못하고 버려지고 말 것이다.
물론 이건 낯설게 하기와는 관련이 없는 문제다. 탈락의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그럼에도 저런 예를 든 것은 '어머니를 죽인다고 해서 소설은
낯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소설을 낯설게 만든다는 것은 여기에서 가볍게 다룰 만한 내용은 아니다. 다만 등단을 목적으로 하는 글을 쓴다면, 공모전 신인상을 목표로
하는 글을 쓴다면 한 가지만 기억하자. 클리셰를 파괴할 것, 뻔한 소설은 쓰지 말 것. 그 원칙의 첫 번째는
「낯설게 하기에 위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아주 뻔하고 단순한 것이다.
작법의 연장 : 필력의 기반은「기본 작법」에 있다.
어떤 소설들은 잘 읽히고, 어떤 소설들은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가독성'이라고 표현한다.
이 글은 가독성이 떨어지네요. 이 글은
문장력이 있어서 가독성이 좋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가독성이란
대체 무엇이며, 향상시키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사실 <기본 작법>이라고 뭉뚱그려 놓았지만 이 역시 광범위한
부분이라 전체를 살펴보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위의 항목에
비추어 잘 읽히는 글, 즉 필력이 있는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에 대해
초점을 맞춰보자. 결국 가독성이나 문장력은
그런 것들이다. 기본 작법은 거기에서 좀 더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을 쓰는
데 있어서 알아야 할, 피해야 할 총체적인
'글쓰기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매끄러운 글쓰기는 단어에서부터 출발한다. 언젠가 우리가 들었던 문장
하나를 떠올려 보자. '쉽게 쓰인 글이 좋은 글이다.'라는
문장인데, 소설에는 크게 통용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소설에서
단어는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다. 어려운 소설이
나쁜 소설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어려운 단어로 이루어진 소설은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가령 "어디서 샀습니까?" 하는 대화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그것을
"어디서 구매했습니까?" 하는 식으로 쓸 수도 있다.
결과부터 이야기하면
전자가 훨씬 낫다. 구태여 '구매'라는 단어를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건 아주
기초적인 예인데, 보통
소설에 들어가는 단어를 살펴보면 이것보다 훨씬 더한 것들이 많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명료한 단어를 쓰는 게 좋다.
가독성이라고 할 법한 부분은 문장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간단한 예문을
통해 살펴보자.
- 어머니는 늘 쌀밥을 지었다. 항상 맛있는 건 아니었다. 수입 쌀이기 때문이었다.
위의 예문은 어떤가. 잘 읽히는가, 잘 읽히지 않는가? 보통의 경우라면 매끄럽게
읽힌다.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은 '왜'이다.
왜 잘
읽히는가(개개인에 따라서 잘 읽히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문장이
짧기 때문에? 호흡이 짧아서? 그 부분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 어머니는 늘 쌀밥을 지었다. (그 쌀밥은) 항상 맛있는 건 아니었다. (항상 맛있지 않은 이유는) 수입 쌀이기 때문이었다.
문장 사이에 생략된 부분들이다. 저 부분들이 없어도 읽는 데는 지장이 없다.
오히려 저렇게 써주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생략된
말들을 이해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문장의 주어와 서술어가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면 매끄럽게 읽힌다. 물론 이것들은 문장의
가독성을 높이는 방법이긴 하지만 소설 전체를 이렇게 써야한다는 건 아니다. 즉,
모든 문장을 이런 식으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내 소설이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다면, 이런 식으로 이어지지 않거나 문장의 주어가 계속 바뀌어서 그럴 가능성이 크다.
위에서 기본적인 것들을 살펴봤는데, 이제 좀 더 기술적인 부분들을
살펴보자. 덧붙여 기초적인 것들이기도 하다.
- 도입부에는 감정을 넣지 말 것.
- 숨길 필요가 없는 것들은 숨기지 말
것.
- 추측과 추리를 구분할 것.
- 의도와 작위를 구분할 것.
앞에서 낯설게하기를 살펴봤는데, 첫 번째 항목은 그것과도 관련이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소설의 도입부에는 감정을 넣지 않는 편이
좋다. 어떤 장르에서도 마찬가지고, 어떤 소재를 다뤄도, 어떤 사건이 있어도
매한가지다. 어머니의 죽음이 소설의 출발이라도 감정은
배제하는 게 좋다. 어머니가 죽으면 당연히 슬프다. 아마추어일수록 슬픈 감정을
과잉되게 쓰는데, 거기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하나도
없다. 전쟁의 참혹성에 대해 쓴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예문을 보자.
마을이 타들어갔다. 우리 집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눈물이 계속해서
흘려내렸다. 뭘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물음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구토가 치밀었다. 이미 사라진 대상을 향한 분노가 내 몸을 옭아맸다.
소리를 지르는 건 나뿐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봤던
구멍가게 주인도, 얼마 전에 새 집을 장만한 신혼부부도 울었다. 우리는
타들어가는 불이 꺼질 때까지 계속 울었다.
아아, 실로 끔찍한 문장이다. 마을이 타들어가면 우리 집도 타들어갈테고,
그러면 슬픈 건 당연하다. 구토도 치밀테고, 분노할 테고,
소리도 지를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반응도 대게는 그렇겠지. 이런 당연한 것들은 서술하지
않는 게 좋다. 오히려 생략할 때 소설은
더 좋아진다. 이런 부분이 아니어도 좋다. 사실 모조리 생략하는 게 좋다. 다른
예문을 보자.
어머니가 사람을 죽였다는 전화를 받은 건 새벽이 다 되어서였다. 경찰은
덤덤하게 말했다. 어머님이 자수했습니다. 사람을 죽였다고.
아버지는
어머니만큼이나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몇 명이나 죽였나요. 실제로
어머니가 덤덤했는지, 아버지의 속마음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때는 나도 덤덤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고작이었다.
원 서사는 단순하다. 어머니가 사람을 죽였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전화를 받았고, 나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이 문단을
우리는 다른 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데, 생략되지 않은 문단을 보면
이렇다.
"사람을 죽였다고요?"
아버지가 말했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유감스럽지만 그렇습니다."
"아내 좀 바꿔주시겠습니까."
아버지는 목이 메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받았다는 것을 확인도 하지 않고 외쳤다.
"당신, 왜 그랬어! 실수지? 아니야, 경찰이 잘못 안 거겠지. 당신은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지?"
"아니에요. 여보. 내가 그랬어요."
좋아, 이제 두 문단을 비교해보면 어떤가. 물론 당신은 투덜거릴 수도 있다.
'이건 너무 과장했잖아.'하고. 하지만 그런 식의 반응은
억울하다. 실제로 작가지망생의 소설들은 대부분 저렇다(물론 전부는 아니다.
대학에서도 고학년일수록 저런 실수들은 잦아든다).
기성작가들의 소설에는 저런 부분들이 없다. 모조리 생략하거나 비트는데, 1)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2)일 때는 뻔하다고
느끼고(진부하니까) 1)의 경우에는 2)에 비해 흥미를 느끼게 된다. 모든 소설은
저렇게 쓰여야 한다. 당연한 것들은 가급적 쓰지 말 것.
꼭 써야겠다면
낯설게 쓸 것.
단락이 길어져서 구분했다. 나머지 부분들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이렇다.
- 숨길 필요가 없는 것들은 숨기지 말 것.
흔히 말하는 속임수 구성이나
반전 구성에 대한 것이다. 알고 보니 -였습니다! 하는 식의 구성에 관한 것인데,
의미가 없다면 숨기지
않는 것이 좋다. 물론 각종 추리소설, 로맨스소설, SF소설, 미스테리소설…… 에서
종종 쓰이는데, 순수문학을 쓸 것이라면 되도록
쓰지 말자. 그 왜, 누군가 죽었는데 그게 알고 보니 나였다던가 스팸문자가 계속
오는데 알고 보니 가족이었다던가. 쓰지 말자.
- 추측과 추리를 구분할 것.
이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추리에는 단서가
있고, 추측에는 의문밖에 없다. 모든 소설은 추리로 이루어져야 한다. 예문을
보자.
내가 죽인 건 펭귄이었어요.
여기서의 펭귄은 무엇인가. 우리는 추측을 할 수 있다. 펭귄은 추운 곳에
사니까, 내 마음 속에 있는 외로움인가? 그게 아니면 펭귄은
귀여우니까 자기 자신의 약한 부분을 말하는 건가? 그게 아니면 진짜 말 그대로
펭귄인가? 펭귄 인형을 말하나?
이렇게 되는 순간 소설은 망한다. 다른 예문도 들 수 있다.
그 때, 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런 식으로 극적인 장면에서 의도적으로 끊는 경우가 많은데, 단서가 없으면
그게 뭐지? 하고 막연하게 추측만 하게 된다. 지금
다룬 예문도 '뭐야, 그건 당연하잖아.'하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인데 역시
작가지망생들의 소설을 살펴보면 이런 부분들이 많다.
이 소설에서
말하려고 하는 게 뭐지? 이건 무슨 뜻이지? 이 문단의 의미가 뭐지? 하는 것들.
추측과 추리는 엄연히 다르다.
- 의도와 작위를 구분할 것.
우리는 소설이 '작위적이다.'라는 표현을 쓴다. 그렇다면 작위적인 건 무엇인가.
작위적인 건 만들어낸 것들이다. 일부러 집어넣은 것들.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을 생각해보자. 결말에 이르기까지 작중 주인공에게는 좋은 일만
있다. 어쩐지 기분이 좋고, 일이 잘 풀리고.
이 내용을 아마추어가 쓰면 뭔가 이상하고 찝찝한 일들만 일어나게 된다.
하필이면 오늘, 하필이면, 하필이면. 개연성이 부족한 장치들이다.
보자,
역시 예문을 통해 이해하는 편이 빠르다.
나는 사람을 죽였다. 몇 명이나 죽였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많이 죽였다.
발각된 건 여고생을 살해했을 때였다. 비가 많이 와서 주위를
살피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빗소리에 정신이 잠시 아득해졌을수도 있고, 내
부주의로 말소리를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것을 끝으로
감옥에 갇히긴 했지만 나는 사람을 꽤나 많이 죽였다. 나는 사형수다.
위의 문장에서 중요한 건 사형수라는 부분이다. 내가 몇 명을 죽였는지,
어디에서 죽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부분들이 꼭 필요한가?
아니다.
만약 필요한 부분이라면 대화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드러낼 수도 있다. 저 부분은
다 덜어내고 '나는 사형수다.'는 한 문장으로
충분하다. 저런 식으로 자꾸 설명해주고, 부연하고, 덧붙이는 것들이 작위적인
부분이다.
지난 텍스트에서 다루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작법은 기본이면서 필수.」
표면효과 : 「작법은 기본이면서 필수」
본론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지난 기본 작법에서 다루지 못했던 내용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다.
- 욕을 사용하지 말 것.
- 독립된 문장을 사용하지 말 것.
- 해석의
빈자리를 남길 것.
- 대화는 가급적 쓰지 말 것.
- 전환에 대해
고민할 것.
모두 하나같이 중요한 내용들이다. 간단하게 살펴보면 아마추어에게 욕은 쓸
수록 마이너스다. 소설이란 것이 문학적으로 가공된
것이기 때문에, 욕을 쓸 때에도 그것이 가공된 것이며 충분한 효과를 발휘해야
한다. 꼭 쓰고 싶다면 '감정이 폭발되는 지점'에
넣는 것이 좋다. 그렇게 쓰려면 그 이전까지의 감정은 절제되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이 시대의 회사원들은 모두 치열하게 싸우며 살아가는 이들이다. 웹툰
「미생」에서의 인물들도 그렇다. 실제의 회사원들은 어떤가.
욕을 쓸까?
고민해볼 필요도 없는 문제다. 하지만 웹툰에서나 드라마에서의 인물들은 욕을
쓰지 않는다. 당연하다. 그렇게 되는 순간
작품의 질이 낮아지니까. 아예 쓰지 못하는 건 아니다. 수용되는 정도는 이
정도다. 작중 등장인물인 장그래의 감정표현은 대게 독백으로
이루어지는데, 마지막에 가서 "시발." 하고 중얼거리는 정도로 가공할 수
있다. 거기에는 대상이 없다. 누구를 향한 욕인지, 어떤 감정인지
는 모두 고도의 틈에서 독자가 읽어낸다. 누군가는 그것을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울분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고 자신의 처지에 대한 심정을
토로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소설의 모든 문장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예를 들자.
"기계는 부지런하다."는 문장에서 무엇이 떠오르는가? 우리는 거기서
많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건 추측의 범위다. 그렇다면 상황을 가정해보자.
낙태를 한 여성이 수술을 떠올리면서 "기계는 부지런하다."
고 표현하면
어떤가? 앞선 문장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 된다. 소설은 이런 식으로 써야 한다.
배치를 통해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지,
그것을 독립적으로 써서 의미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해석의 빈자리는 '틈'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 중요하지 않은 기법들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 부분은 특히나 중요하다. 심사위원을
대상으로 한 소설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소설을 쓰면서 주제나 의미, 내포된
바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 소설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가. 가장 좋은 소설은 독자를 설득하는 게 아니라, 생각의 여지를 남기는
소설이다. 예를 보자.
나는 다시 시선을 거실로 돌린다. 아빠와 언니는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내 마음에는 이미 씁쓸함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죽어있어서,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작은 분노를 느낀다. 내가 죽었을 때의
파도를 엄마가 가져가버린 거다. 내 자살은 엄마가 죽은 것처럼
충격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엄마의 화장대 위에
가족 외식 권 한 장을 놓아둔다. 내가 중얼거린다.
엄마는
성공했구나.
부끄럽지만 언젠가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썼던 소설 중 일부다(이걸 예시로 들긴
했지만, 결코 필자의 소설이 좋다는 건 아니다). 계속해서
자살을 시도하는 여중생의 이야기인데, 어느 순간 엄마가 죽는다. 작중 주인공인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말한다. 엄마는 성공했구나.
이건 소설을 낯설게
만드는 방법과도 연관이 있다. 그러면서도 틈을 만든다. 죽음을 성공이라고
표현하면서, 독자에게 생각의 여지를 남긴다.
그래, 그럴수도 있구나.
어떻게보면 이 시대에 사는 건 그런 것일 수도 있겠구나.
소설에서 가장 만들기 힘든 건 무엇인가? 스토리? 등장인물? 사건? 배경?
배경묘사? 심리묘사? 주제를 드러내는 방법? 전부 아니다.
(그것들이야 당연히 어려운 건 맞지만서도) 가장 만들기 힘든 것은 대화다. 왜?
대화는 독이다. 쓸수록 소설의 완성도를 낮추기 때문에,
기성 작가들도
아주 짧은 문장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긴 호흡의 대화는 자칫하면 흐름을
깨뜨리며, 부자연스러움을 낳는다.
대화에 대해 설명하려면 불가결하게 스토리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서사라고 부르는 것들, 소설의 대략적인 흐름이 되는 것들에
대해서다. 자, 그러면 당신이 소설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자.
「소설에서 스토리는 중요한가?」
위의 물음에서 당신은 그렇다고 대답했는가, 아니라고 대답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장르문학이냐, 순수문학이냐에 따라 다르다.
소설에서
스토리가 중요한 경우는 장르문학일 경우다. 추리소설, SF소설, 로맨스소설, 이런
종류의 소설들에서 스토리는 중요하다.
지금 글에서 다루는 것은
순수문학이기 때문에 정답을 먼저 이야기하면 '아니오.'가 된다. 그렇다,
스토리는 중요하지 않다.
소설에서 스토리가 중요하지 않다니? 혹자는 담담하게 수긍할 수도 있고,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열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정말로),
소설에서
서사라고 할 법한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아닌
경우부터 보자. 즉, 소설에서 스토리가 중요한 경우.
일본의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를 아는가? 용의자 X의 헌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백야행, 비밀, 레몬, 편지, 악의, 동급생, 성녀의 구제,
몽한화,
한여름밤의 방정식… 이런 작품들이 있는데, 대게의 스토리는 탄탄한 편이다.
기반을 추리소설로 잡고 있기 때문이고 구성도 크게
나무랄 데가 없다. 소설 전체에서 대화가 차지하는 지문은 굉장히 많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무엇인가?
장르소설에서 대화는 많을 수밖에 없다. 여러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설명만
있으면 재미가 없기 때문에, 등장인물에게 개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사건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이런 이유들로 대화를 많이 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순수문학에서는 그렇지 않다. 장르문학에서 대화는
가공될 필요가 없지만 순수문학에서의 모든 대화는 가공되어 있어야 한다.
문학적으로 의미가 있어야 한다. 아, 실로 복잡한 일이다.
나도 까짓것
대화 그냥 쓰면 안 되냐고 묻고 싶다.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골치가
아픈 것이다.
문단을 바꾸는 경우는 언제일까?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경우가 몇 가지
있다. 극적인 장면에서, 내용이 바뀌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대답부터
먼저 하자면 문단의 전환도 독이다. 앞에서 대화는 독이라고 했는데, 문단의
전환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아주 가볍게(별 감흥 없이)
문단을 바꾼다면
이는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문단을 바꾸는 것이 의미하는 건 하나다. 서사에
대한 고민 부족. 우리는 도피처로 전환을
택한다. 그렇다. 만만한 것이 전환이다. 우리는 얼마나 서사에 대해 고민을 한
후에 문단을 바꾸는가? 그 점을 유념하도록 하자.
표면효과 : 우리는 시점에 대해 고민한다. 1인칭으로 쓸까, 3인칭으로 쓸까.
표면 효과(Surface Effect)는 본래 과학적 용어로 '원자력 표면의 핵자의
결합력이 내부보다 강해 생기는 핵물리현상'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소설에서의 표면 효과는 겉으로 드러나는 문학적 효과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
그렇다면 왜 표면 효과가 시점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표면 효과에 설명하기에 앞서, 우리가 시점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살펴보자. 글을 쓴다면 반드시 거쳐할 숙제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할 것인가, 3인칭 시점으로 할 것인가(물론 세부적인 다른 시점들을 제외하고)를
고민해야 하는데, 알다시피 효과가 다르고 어떤 시점이
내가 쓰려고 하는 소설에 더 어울릴 것인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걸
다르게 표현하면 '어떤 시점을 쓰는 게 더 좋은가?'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좋다, 여기까지 왔으면 다 온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1인칭과 3인칭은 어떻게 다른가? 당신이
소설에 대해 얼마나 알던 간에, 이 물음에는 몇 가지 대답을
할 수 있다.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르죠. 그런가하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르고요. 글이 얼마나 객관적으로 서술되는지도
영향을 미치죠. 1인칭에는 감정이 들어갈 수밖에 없고, 아무래도 3인칭보다
주관적일테니까요. 등장인물에게 얼마나 밀접하게 붙어서
서술되는지도 차이가 나겠네요. 독자와의 거리감이라고 하나요? 분위기 형성에도
영향을 미치고요. 당장 판타지 소설만 봐도 느낌이
확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고민을 하는 거죠.
위의 대답들은 모두 옳다. 우리는 저 외에도 다른 대답을 떠올릴 수
있는데, 그 대답들도 모두 옳다. 시점의 차이는 가볍게 볼 만한
문제가 아니고, '어떤 소설을 어떤 시점으로 쓰는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당신이 알고 있는 소설들(흔히 명작이라고 하는 것들,
혹은 내 마음 속
소설의 순위에서 최상단에 있는 것들)의 시점을 바꿔버리면 어떤가. 더 나아질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이제 시점의 중요성을 더 설명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니, 「표면 효과」라고 하는 이 생소한 용어에 대해 알아보자.
표면 효과는 3인칭을 위한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시점의 차이에
대해 잠깐 언급했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표면 효과에 있다.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다. 3인칭 서술에는 표면 효과가 있지만, 1인칭 서술에는 표면 효과가
없다. 이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항목 0의 표면 효과의 정의에 대해 살펴봐야 하는데, 아직까지도 우리는 대체
표면 효과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 수 없다. 그렇다면
간단한 예시를 통해서 살펴보자.
나는 오유의 오징어 파티에 참가하기 위해 정장을 입었다. 정장이 필요한
이유는 한 가지다. 뒤통수를 맞지 않기 위해서. 말이야 오징어라고
하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말 오징어가
되지 않으려면 옷차림이라도 신경을 써야 한다. 나는
그런 식으로 합리화를 하면서 약속 장소에 갔다. 충격적인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정장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오징어는
한 마리도 없었다. 아니, 한 마리만 있었다. 그건 바로 나였다. 나는 정장을
찢어버렸다. 속이 쓰렸다. 사기꾼 자식들.
자, 우리는 오징어들에게 사기를 당하는 예를 들었다. 쓰다 보니 뜨끔해서 이 예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시점을 바꿔보자.
그는 오유의 오징어 파티에 참가하기 위해 정장을 입었다. 그런 다음 그는
약속 장소에 갔다. 충격적인 광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를 포함한
모두가 정장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정장을 찢어버렸다.
두 문단을 비교해보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당신은 먼저 밀도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전자에 비해서 후자는 너무 줄였는데요.
그건 당연한
일이다. 1인칭이었을 때 필요했던 서술은 3인칭에서는 필요가 없다. 그건 사족일
뿐이다(물론 1인칭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자, 당신은 다른 차이점 하나를
발견해야 한다. 모르겠다고? 그러면 다시 보라. 그런 다음에도 모르겠으면 다음
항목으로 넘어가자.
1인칭에는 감정에 대한 서술이 부차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 전자에서 살펴보면
'나는 정장을 찢어버렸다. 속이 쓰렸다.'와 같은 부분들이다.
1인칭
시점에서는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서술자가 단순히 사건 전달의 역할을
한다면야(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떠올려보자.) 관련이
적은 부분이다. 그렇지 않은 모든 경우에는 우리는 감정을 서술할 수밖에
없다.
3인칭은 그렇지 않다. 아래의 문장을 보자.
그는 정장을 찢어버렸다.
작법에서 문장의 독립성을 다뤘다. 모든 문장은 독립적으로 쓰여서는 안 된다.
저 문장은 어떤가? 마찬가지로 독립적으로 쓰일 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우리는 배치를 통해 저 문장을 전달하는 것뿐이다. 오유의
파티가 있었고, 정장을 입고 갔고, 거기 있는 모두가
정장을 입고 있었던 것, 그래서 정장을 찢어버린 것.
자, 당신은 그의 심리에 대해 알 수 있나? 그것이 표면 효과다. 즉, 1인칭에는
감정을 서술해야 하지만 3인칭에서는 감정을 서술하지 않아도
독자는 그것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 배치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표면 효과를 이미 많이 경험했다. 기성작가들의 소설이나,
외국소설에서.
'아니, 나는 처음 보는데?'라고 한다면 그건 순 거짓말이다. 당신이 오징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앞에서 다뤘던 것, 여기에서 다루는 것을 접목해서 우리가 봤던 소설들의 문단 마지막을 떠올려보자.
아내가 죽었다는 이야기에 나는 울부짖었다. 연기이길 눈치채지 못하게 계속해서
눈물을 짜냈다. 그렇게 우는 사이 마음 속에서는 정말로
슬픔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번져나갔다.
아내가 죽었다는 이야기에 그는 조용히 웃었다.
이번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첫 문단은 감정의 과잉이다. 당신이 앞에서 다룬
내용들을 숙지하고 있다면 문제점을 바로 파악했을 것이다.
감정의 클리셰.
결국 원 서사는 '나는 아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내가 우는 것은
연기이다.'는 것이다. 첫 문단은 그렇게
쓰였다. 울부짖고, 눈물을 짜내고, 우는 사이 정말로 슬퍼지고. 물론 이건 단지
표면 효과의 차이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다음 문단은
비튼(낯설게 한) 문장이기 때문에. 하지만 명백한 차이점이 있다. 등장인물의
감정을 서술하는가의 여부다.
글이 길었다. 결국 1인칭과 3인칭을 고민하는 것은 「표면 효과가
필요한가」에 있다. 저런 식의 여운을 남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3인칭으로
써야 한다. 1인칭의 '나'일때는 감정의 서술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 두 가지는
질감이 확연하게 다르다. 공지영의 장편소설 '도가니'를 예로
들어보자. 도가니의 작중 서술자는 '강인호'인데, 그가 보는 시점으로 서술이
되어있다. 그렇다면 왜 공지영은 장애우의 시점으로 글을 쓰지
않았는가? 만약 성폭행을 당한 장애우의 시점으로 쓰였으면 이 소설은 출간되지
못했다. 소설 전체가 나는 슬펐고, 장애를 앓고 있었고, 힘이
약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그저 순응해야 했고, 이 생활은
고통 그 자체였고…… 그런 삼류 소설이 된다. 그걸 피하는 방법에
는 서술자를 전달자로 두는 방법이 있지만, 공지영은 3인칭으로 쓰는 것을
택했다. 그래, 그것이 표면 효과다.
비틀기 : 낯설게 한다는 건 무엇인가? 무엇이 소설을 「신선하게 만드는가?」
우리가 소설을 평가하는 기준은 수없이 많다. 그런 것들을 배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첫 번째 원칙에 대해 이야기했듯,
소설의 각종 완성도를
높이는 작법들과 기법들을 제외하고 나면 '이 소설이 신선한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그것은 모든
소설을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이 소설이 독자에게 낯설게
다가오는가?'의 문제다. 소설을 포함한 모든 글의 가장 우선
순위는 '이 글이 흥미를 유발하는가'의 문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가지 공통된
질문을 떠올린다. 「어떻게?」
사전에
예고하지만, 소설을 낯설게 만드는 방법은 굉장히 많다. 기성작가들은 그 중 한
가지의 방법을 차용해서 소설을 만든다.
즉, 구성 단계에서 어떤
표현기법을 사용할지를 책정하고 소설을 쓴다는 이야기다. 그 방대한 분량은
가볍게 다룰 만한 것이 아니므로
여기서 밝히는 기법들이 높은 밀도로 정제된 것이라고 이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까지 다뤄온, 지금부터 다룰 내용들은 방대한
지식들의 축약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의 글을 쓰기 위해서 알아야 할 기본적인
것들」정도로 이해하는 편이 좋다.
어떻게 하면
소설을 낯설게 만들 수 있는가?
이것은 당신을
향한 물음이다. 당신이 문학에 대해 얼마만큼의 지식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공통된 한 가지는 '뻔하고 진부한
소설은 읽고 싶지 않다.'는 것을 전제하자. 여태까지 우리가 읽었던 '신선한'
소설들은 어땠는가. 결국 우리가 문제를 던져야 하는
부분은 '무엇이 우리를 이 소설이 낯설다고, 신선하다고 느끼게끔
만들었는가?'이다.
특별한 소재를 다룬다고 해서,
소설이 특별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설을 불가해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가령 '본래 남자였는데
어떤 사건을 계기로 성별이 바뀌어서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는 흔한 소재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 외에 어떤 것을 가져와도 마찬가지다.
필라테스크
섬(이라고 임의로 만들어낸 어떤 명칭)에 팔려나간 십대 소녀가 겪는 이야기를
쓰면 거리감만 벌어진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당신은 슬슬 불만을 제기할 것이다. '그래서 본론이 뭔데.'쯤 되지 않을까. 좋다,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보자.
소설을 낯설게
만드는 방법 중 대표적인 것들 몇 가지가 있는데(이 단원에서 다루지 않을
내용들도 많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언급하겠다.) 그 방법론이 바로 '비틀기'이다.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는
'비틀어서 낯설게 만드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세부적인
방법에는 「의미화」, 「구체화」, 「형상화」가 있다. 슬슬 감이 잡히는가? 감이
잡히지 않아도 좋다. 이 내용들을 천천히 한번 두들겨보자.
의미화는 의미 부여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사유의 틀기
작업이다. 작가의 통찰력이나 시각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인데, 바꿔 말하면
'작가가 사물이나 사태에 부여하는 기존의 의미가 아닌 다른 것'의
총칭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날씨에
대한 예감이 적중하자 세키는 조금 더 과감해져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뛰어내리기에는 밤이 좋아요." 아녜스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 아이는 23층에 산다. 세키는 창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고층
아파트 베란다는 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을 끝내기
위해 필요한 공간일 수 있다.
박금산, 「아일랜드 식탁」중
자, 당신이 읽은 저 텍스트에 대한 감상은 어떤가. 소설가
박금산의 아일랜드 식탁 중 일부인데, 저 부분을 숙지하고 아마추어의 소설도
보자.
그는 평범한 대학생이긴 했다. 그런
주제에 평범함이 싫었던 것은, 아무리 애써도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평범함을
쫓으면서 얻을 수 있는 건 많았다. 졸업 때까지 쌓일 빚이 그랬다.
이제 감이 잡히는가? 저렇게 서술되는 것을 '사유'라고
하는데, 모든 비틀기의 기본이 되는 부분이며 작가들의 개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즉, 의미화란 기존의 대상이 가진 의미가 아니라, 새롭게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일랜드 식탁에서는 '뛰어내리기에는 밤이 좋다.'
는 부분과 '고층 아파트는 생을 끝내기 위해 필요한 공간'이라는 부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아래의 예문은 조금 더 간단하면서 쉬운 예시다.
'졸업 때까지 쌓이는 빚은 평범함을 쫓으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여기에 대해서 '그 정도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잖아.'하고 말할
수도 있고 '뭐야, 대충 감은 잡고 있던 건데.'하고 말할 수도, '막상 보니 별 거
아니네.'하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실제로도 무의식적으로
의미화 작업을 거치고 있다. 정말 그럴까? 당신이 썼던, 혹은 당신이 보았던
소설의 문단 중 마지막 문장을
떠올려보라. 우리가 그것을 '오, 느낌이 있는 문장이다.'하고 생각한다면 그건
사유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동시에 의미화는
이런 느낌을 부여하기 위한 좋은 도구이기도 하다.
당신이 무슨 이야기를 써도 좋다. 거기에는 분명한 주제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뚜렷하게 만드는 방법이 의미화다.
위에서 아일랜드 식탁의 극히 일부를 봤다. 우리는 저것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당신은 이미 저 소설의 내용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감을 잡고 있지 않은가? 어떤 소설은 전부 읽어도 '대강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기는 하겠는데…'하는 추측만을 남기고 어떤 소설은(대부분의
좋은 소설들) 전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 뚜렷하게 알 수 있다.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사유와 의미화다.
형상화는
메타포와는 다르다. 메타포는 인접성에 근거하는 각종 수사법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신은 오징어다.'라고 하는 문장이 그렇다.
우리는 오징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이것은 오징어에서 연상되는 못생김의 이미지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비유를 들어보자.
-당신은 거미줄이다.
-당신은
생활쓰레기 배출안내 스티커다.
-당신은 크린손 뉴센스 장갑이다.
-당신은 썩은 이다.
위의 세 비유에 대해서(혹은
소설에서 이렇게 주장한다면)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이미 답은 나와있다.
그렇다. ?이다. 우리는 머릿속에
떠올린다. '?'하고. 저게 무슨 뜻이지? 왜? 어째서? 하고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당신을 오징어라고 비유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말하자면 거리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비유에 대해 추측을 하지 않게 만드려면, 확연하게 드러난 거리감을
줄여야 한다. 이 작업을 구체화라고 하는데(이 부분은 후에 다시
기술하겠다.) 이러한 구체화를 위해 형상화를 좀 더 꼼꼼하게 따져보자.
당신은 생활쓰레기 배출안내 스티커다. 이
문장은 어떻게 느껴지는가. 조금 낯설지 않은가? 이런 예시를 들어보자.
그녀와 만난지 삼 년째 되는 해,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생활쓰레기 배출안내 스티커였어. 그것은 그를 향한 말이었고,
동시에 그녀
자신을 향한 말이기도 했다.
배치를 통해서
전달하지 않는다면(위와 같이 문장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경우) 그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오히려 왜 저렇게
표현했는지 독자를 추측하게만 만들 뿐이다. 다르게 말하면, 배치를 통해 독자를
설득하고 굴복시킬 수 있다면 어떠한 비유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작가는 신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형상화와
구체화를 통해 독자들을 설득하고, 굴복시킬 수 있다. 좋다.
그렇다면
아마추어(…)의 잘 못쓴 예 하나를 보자.
방울성게, [지영]은 이가 아팠다.
당신은 썩은 이다.
위의 문장이
독립적으로 쓰이면 어떤가. 당신은 납득할 수 있는가? 작중 등장인물인
'지영'에게 '희철'은 썩은 이와 같다. 여기는 추측이
따라붙는다. 왜? 왜 희철이 썩은 이지? 만약 배치를 통해 전달하지
않는다면(누누히 강조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추측을 하게 된다.
언젠가
펭귄에 대해 다뤘을 때처럼(기억나지 않는다면 소설 기법(2)-기본 작법을 다시
살펴보자.) 막연하게 추측해야만 할 뿐이다.
하지만 소설
전체에 걸쳐 납득할 수 있게끔 '형상화' 해준다면, 독자는 그 부분에 대해서
추리를 할 수 있다. 형상화가 가진 특별한 점은
고도의 틈이 생긴다는 것인데(아이유의 제제 사건을 떠올려보라. 우리는 아이유의
제제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분석을 했고, 주장을 했다.
그것이 틈이다.
우리는 틈을 통해 해석권을 얻고, 주장의 근거들을 확립한다. 아이유의 제제는
선정적인 메세지일 수도 있고, 성장기에
대한 다른 표현일 수도 있고, 성적인 무의식의 표현일 수도 있다. 이런 부분들을
문학에서 전달하는 방법이 형상화다. 그리고, 이런
주장들은 모두 옳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다. 주제가 없어도 된다는
것이다.
위의 이는 어떤가. 마땅히 주제라고 할 법한 것이
있는가?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희철이 썩은 이라는 건 알겠는데 이
글에서
전하려고 하는 바가 뭔데?'하고. 형상화는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철저하게 가공된 틈안에서 추리하고, 생각하게 되고, 여운을
느끼게 된다. 당신이 심사위원들을 굴복시키고 싶다면 형상화를 써라. 그들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던 간에 당신은 설득하고, 굴복시킬
수 있다. 가령 '유년시절, 저에게 아버지는 참기름이었습니다.'라는 섵불리
다가가기 힘든 문장도 우리는 얼마든지 구체화를 통해 형상화
시킬 수 있다(구체화는 다시 다루겠다).
메타포에 대해 잠깐 언급했는데, 만약 '[희철]은
투명드래곤이다' 라는 문장을 쓴다면(무분별하게 가져온 비유에 대해 오즈™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이는 메타포에 기댄 문장이다. 우리가 투명드래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들(짱 세다, 존나 세다, 개 쎄다, 슈퍼 짱짱맨이다 등)을
통해 '희철은 최고 존엄이며 필적할 자가 없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는 셈이다(사실 우회적이라고 하기에도 그렇지만).
아마추어의 소설들 중, 소설 전체에 계속 같은 단어가 반복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이는 부족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메타포에 기댄 소설이다.
자신감이 부족할수록 문장에 힘을 주게 되고 불필요한 사족이
길어지며(앞에서 다룬, 작위적이라고 할 것들) 메타포에 기대게 된다. 당신이
배치를 통해 구성을 끝냈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 명료하거나, 혹은 조금
난해하게 써도 독자는 모두 납득할 수 있다.
구체화라는 단어에서 오는 느낌은 어떤가? 그건 아마 옳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인데, 거리감이 먼 문장들에 대해서 독자가
받아들일 수 있게끔(추리할 수 있게끔) 의도적으로 문단들을 배치하는 것이다.
좋아, 더 쉽게 표현해보자.
-당신은 썩은 이다.
-당신은 오징어다.
비유 재탕인 것 같지만(사실 맞음)
두 문장은 느낌이 다르다. 두 번째 문장은 인접성에 근거하고 있고(메타포),
거리감이 가깝기 때문에
부연설명을 해줄 필요가 없다. 더 쓰는 순간 소설은 작위적으로 변한다. 만약
'부장은 개새끼야.'라는 문장을 쓴다면, 이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그렇지 않은가. '부장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완성되지 않은
표본이다'정도의 거리감을 가진 문장이 아니라면).
당신이
무엇을 쓰던 낯설게 할 방법은 고민해봐야 한다. 원 서사야 다 고만고만한
것이다. 스토리라고 부를 법한 것들을 기성작가들의
순수문학에서 찾아보라. IS에 대해 썼나? 광복 이전의 참사에 대해 썼나? 아니다.
사실은 모두 불우한 가족서사거나, 동성애나 양성애,
금지된 사랑, 인간의
성장과 내면, 왕따에 관한 것들일 것이다(하여간, 이 외에도 많지만 결국은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들).
필력이 있는 글을
쓰기는 쉽다. 어렵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쉽다. 기본 작법에 근거하며, 안정된
문장으로 쓰면 우리는 '가독성이 있다.'나
'문장이 깔끔하다.' 혹은
'군더더기 없다.' 등의 평가를 내린다. 그렇다면 이제 생각해보자. 왜 사람들이
소설을 쓰는 것을 창작의 고통이라고
말하는가? 그건 비틀기에 있다. 혹시 공모전에 소설을 투고하거나 백일장에서
글을 써보거나, 대학 입시로 글쓰기 시험을 치룬 적이 있는가?
가령 '손가락'이라는 글 주제를 주면, 우리는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쓰게
된다. 혹은 손가락에 관련된 직업에 대해서 쓴다. 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메타포에 기대어 글을 쓰는 셈이다. 이런 건 어렵지 않다. 아니,
말했듯이 쉽다. 창작의 고통은 낯설게 만드는 과정, 비틀기에서
온다. 좀 더 보자.
당신이 만약 왕따의 실태에 대해 쓰고
싶거나, 대한민국의 차별적 시선들에 대해 쓰고 싶다면 우선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은 이 소설을
어떻게 낯설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서다. 의미화도 좋고, 형상화도 좋다. 구체화도
좋다. 단지 필력이 있는 글을 쓰고 싶다면 고민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렇게 되면, 뻔한 소설을 쓸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일진들이
등장하고, 왕따를 당한다는 내용의. 일진들은 욕도 쓴다. 시발년아!
빵
심부름도 시킬 수도 있다. 아니면 급식을 받아놓으라거나, 체육복을 뺐는다거나,
혹은 자기 계정의 메이플스토리2 레벨을 올리라거나(흑흑)!
그런 소설을 쓰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낯설게 만들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라. 그것이 창작의 고통이다.
그 외에 다루지
않은 기법들.
-생략법(특징만 잡아서 남겨놓기. 쓰고 싶은 걸
죄다 쓰는 게 아님.)
-충돌기법(두 가지 평범한 소재를 엮어서 새롭게
활용하는 방법. 간단하면서도 효과적.)
-재배치[:Replacement](문장, 단어,
소재, 내용만 바꾸어서 낯설게 만드는 것.)
-인물 비틀기(기존에 있던
인물을 비틀어서 낯설게 만드는 것.)
-반대로 말하기(예측되는 내용을
반대로 말하는 것.)
위의 목록 중 몇 가지를 활용해서 예문을
만들어보자.
엄마, 죽었어? 내가 물었다.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 죽었어? 내가 다시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길래 스카이콩콩은 타지 말라고 했잖아. 그건 아이들이나 타는
거라고. 엄마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엄마,
진짜로 죽은 거 맞아? 엄마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중얼거렸다. 휴,
드디어 죽었네.
위의 예문에는 생략법이
쓰였다. '나'는 수많은 대화를 할 수 있지만(왜 그랬어, 그러길래 잘하지,
이만하면 죽을 때 됐잖아, 내가 그런 건
아니야…… 등) 가장 핵심적이고 특징적인 부분만 남겼다. 이렇게 쓰지 않아도
좋다. 작위적인 소설을 쓰고 싶지 않다면 필요 없는 부분은
모조리 생략하라. 사족을 제외하고 쓰면 소설의 완성도는 훨씬 높아진다.
그런가하면, 인물 비틀기도 쓰였다. 현실에서 저런 '나'가
있을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하여간 평범하지는 않다.
이런 식으로 비튼 인물들을 쓰면 소설은 낯설어진다.
충돌기법도 쓰였다. 스카이콩콩이라는 소재와, 엄마의 죽음이라는 소재의
충돌이다(물론 저 짧은 문단에서 스카이콩콩이 제대로 쓰였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배치를 통해서 제대로 만들었다면……). 이런 식의 소재의 충돌은
소설을 낯설게 만든다.
자, 우리는 여기까지
「비틀기」에 대해 배웠다. 우리는 이렇듯 조금씩 비틀고 낯설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훨씬 양질의 글을 쓸 수 있다.
여운 : 「좋은 작품은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우리는 흔히 「여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소설을 여운이 참 많이 남았습니다. 그렇다면 여운은 무엇인가.
당신은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소설에 흠뻑 빠졌다가 책장을 덮는 순간,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에
느끼는 진한 감동, 혹은 어떠한 감정의 교류들. 우리는 대게 '여운이 남는다.'고 이야기한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그렇다면 작가의 입장에서 여운은 대체 어떻게 만들어내는 것인가?
여운을 남기는 것에는 필수적인 요소들이 붙는다(당연한 이야기다. 당연한 전제조건들을 살펴보자).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소설이 일정 페이지 수를 넘길 것(아주 짧은 단편으로는 여운을 남기기가 힘들다, 불가능한 것은 아님)
- 몰입도가 있을 것
- 가독성이 있을 것
- 독자를 납득시킬 것
- 거리감이 가까울 것(처음에는 멀어도 좋다)
- 독립적인 문장을 사용하지 않을 것
- 감정표현을 절제할 것
- 틈을 만들 것
자, 우리가 따라왔던 대로라면 당신은 이제 불평을 할 수 있다. '위에 열거한 것들은 너무 당연한 것들이다.'고 말할 수도 있고,
'이야기하기는 쉽지만 저대로 만드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자, 그렇다면 천천히 알아보자.
본론에 앞서, 위에서 열거한 항목들에 대해 간단히 다루자면 아래와 같다.
위에서 다룬 방법들을 제외하면 '틈'이 남는다. 우리는 틈을 통해 여운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틈이란 무엇인가.
「틈」이란 독자의 고유한 해석권이며, 이는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추측과 추리를 구분할 줄 안다면, 이제부터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떻게 틈을 만드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만화에서는 추리의 단서들을놓아두고 '떡밥'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만화에서는 통용되는 부분이지만, 소설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다. 떡밥이라는 것은 얼핏 보기에는「추리의 단서」라고 착각하게끔 만들지만, 본질은 「추측의 범주」에 있다. 만화에서 추측이 성공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흥미를 유발할수 있기 때문에. 만화에서는 그림체와 구도라는 수단으로 이를 보충할 수 있지만, 소설에서는 불가능하다. 만약 소설에서 이런 추측을 여지를남긴다면 독자는 '이게 뭔데?' 라고 생각하게 된다. 결국 '-였다!'고 밝힌다면 '오, 과연 앞뒤가 맞는군!' 이라는 반응이 아니라 '그래서?' 라는의문을 남길 수밖에 없다. 이런 부분을 명심하고, 틈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보자.
위에서 다뤘지만 틈이란 독자의 고유한 해석권이다. 풀어서 설명하면, 독자가 나름대로 추리하고 주장하게끔 만드는 고도의 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예시를 들어보자.
하정우, 최민식 주연의 '범죄와의 전쟁'이다(스포일러는 하지 않겠다).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혹시 결말에
대해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나? 그리고 주장이 나뉘거나 하지는 않았나? 좋다. 그렇다면 다른 예시도 보자.
영화 '올드보이'는 어떤가. 이 영화에서의 결말은 깔끔한가? 마찬가지로 그렇지 않다. 그런가하면, 범죄와의 전쟁과 올드보이가 모두 열린
결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열린 결말'의 정의는 실제의 의미와 조금 다를 수 있다. 열린 결말은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서사는 끝나지 않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대게의 성장소설에서 '오늘따라 유난히 하늘은 푸르렀다.'고 하는 부분이다.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서사 자체는 끝나지 않았다. 우리에게 다만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범죄와의 전쟁과 올드보이에 대해서는 왜 해석의 여지가 있으며, 결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가? 그건 작가의 의도에 있다.
사실 결말에 대해서 작가에게 답을 요구하는 건 좋지 않다(가만 생각해보니 인셉션도 같은 맥락에 있다). 결말에 대한 우리의 주장은 모두
옳다. 그건 추측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같은 영화를 보았고, 우리의 상황이나 가치관에 따라 다른 식으로 해석하면서 틈을 본다.
이제 다시 소설로 돌아가보자. 결말이 아니라도 좋다. 소설의 주제는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주제란 결국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에 있다. 장르소설의 경우는 주제가 없다. 범죄소설, 추리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건 무엇인가? 범죄는 잔혹하다? 범죄는 윤리를 배반하는 것이다? 판타지소설도 같은 선상에 있다. 드래곤은 강력하다?
게임을 하려면 센스가 있어야 한다? 이런 부분을 차치하고 보자. 대체 왜, 「틈은 왜 필요한가?」
"A는 B다."는 식의 은유를 생각해보자. 이 수사법은 모든 주장의 뿌리다. 우리가 말하는 좋은 작품들에는 이러한 주장이 들어가지 않는다.
올드보이와 범죄와의 전쟁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작품성이 있는 것이다. 좋은 소설의 요건 중 한 가지는 '독자를 생각하게 만들 것'에 있다.
그렇게 만드는 장치가 '사유'와 '틈'인데(사유는 다음에 다시 다루겠다) 틈이란 결국 '독자가 추리하게끔 할 수 있는 의도적인 간극'이다.
누누히 말하지만, 틈을 만들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조건은 '추측'이 아니라 '추리'를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 「인셉션」을 보고
의견이 분분했으며, 모두 일리가 있는 주장들이었다. 거기에서는 '반지'라는 장치를 통해 추리를 실현시킨다. 그러한 요소들이 없다면
인셉션은 망했다.
「좋은 작품은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에 대해 당신이 '그렇다'고 말한다면 틈을 유념하라. 당신이 작가가 되고 싶다면, 글을
잘 쓰고 싶다면 틈에 대해 생각하라. 우리는 지금까지 다룬 각종 기법들로 '독자를 납득시키고 설득시킬 방법'에 대해 알고 있지만
우리가 해야할 건 그런 것들이 아니다. '범죄는 잔인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왜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묘사 : 「소설에서의 묘사는 객관적이어야 하는가, 주관적이어야 하는가?」
위의 물음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당신이 소설을 조금이라도 써본 사람이라면, 혹은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정답을 먼저 말하자면,
현대 소설에서의 묘사는 주관적이다. 낭만주의 이후의 묘사는
주관적(감정적)이었으며, 리얼리즘 이후로는 묘사는 다시 주관적으로 바뀌었다.
이런 역사적 문예사조를 제외하고 나면 묘사는 왜 주관적이어야 하며, 과연
그것을 좋은 묘사라고 할 수 있는가?
간단히 짚고 넘어가면, 서술과 묘사는 별개의 문제다. 글의 서술은
반드시 객관적이어야 한다. 1인칭에서도 그렇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관찰자라면 사건을 전달만 하기 때문에 객관적일 수 있지만 주인공 시점에서는
불가능하지 않느냐.'고. 그건 타당한 이야기지만, 옳다고는 할 수 없다. 서술이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글이 얼마나 안정적인가와 직결되는 문제다. 가령,
아래의 문장을 보자.
1) 그녀의 눈에서 망설임은 읽혀오지 않았다.
2) 그녀의 눈은 덤덤하게
투명했다.
1)의 경우는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서술 자체는 객관적이다. 2)는 어떠한가. 주관적이며, 서술 역시 주관적이다. 이런 문장들은 불필요한 사고의 과정을 거치게 만든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읽다가 걸리는 느낌'이다. 가독성을 저해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전에 다룬 틈과는 명백하게 다르다. 굳이 '덤덤하게 투명한 것이 무엇인지 한번 더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묘사는 왜 주관적이어야 하는가? 엉터리다!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다. 천천히 살펴보자.
소설에서 묘사는 중요한 부분이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는 않다. 어떤
소설이냐에 따라 비중이 다른 것이다. 판타지 소설이나 각종 추리 소설에서
묘사는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여기서 다루는 순수문학에서는 그렇지
않다. 순수문학에서의 '그'는 어떤 존재인가? 예를 들어보자.
그는 평범한 가정의 아버지다. 색이 바랜 쥐색 정장을 입고 다니며, 바지의
아랫단은 늘 구겨진 채다. 머리에는 희끗희끗한 새치가 보이며,
짙은 눈썹
아래의 눈동자는 항상 피곤에 절어 있다. 꺼칠한 피부는 그대로 목까지 이어져
서글픈 느낌이다.
위의 묘사들은 모두 생략될 수 있다. 사실 특별하게 의도한 것이 아니면
생략하는 편이 좋다. 사족이 될 수 있고, 글이 지루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는 평범한 가정의 아버지다' 라는 한 문장으로 압축하는 것이 좋다.
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올 때마다
머릿속에 그려주는 것은 불필요한 작업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것은 해리포터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주관적인 묘사는 무엇이고, 객관적인 묘사는 무엇인가?
묘사를 주관적으로 해야 하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소설을 낯설게 만드는 측면에 있다. 지겹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또
그 놈의 낯설게 하기냐?'라고 묻고 싶다면, 반대로 생각해보자. 당신은 식상한
비유와 묘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다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당연히 싫다. 하지만 식상한 비유와 묘사를 쓰지
않으면 되지 않는 문제가 아닌가.' 하고.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자명하다. 우리가 '중세시대의 건축 양식으로 만들어진 현대의 건축물' 정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면, 객관적인 묘사를 할 경우 반드시 기존에 있던 소설과
겹치는 문장을 써야 한다는 점이다. 예시를 통해 보자.
0) 꿈을 꾼 게다. 몇 주 전에 봤던 여자 점쟁이의 꿈. 맞다. 숄도 수정공도
없었지만 점쟁이는 점쟁이였다. 마틸드는 전철을 타고 파리 시내를
가로질러 서쪽 끝에 있는 16구의 한 건물 1층으로 들어가 두꺼운 커튼 뒤에
앉았다. -델핀 드 비강, 「지하의 시간들」 중
위의 소설은 우리 나라에서 2011년에 발매된 소설이다. 일부를 가져왔는데, 위의
점집에 대한 묘사는 객관적인가, 주관적인가? 만약 위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썼다면 '그 점집에는 촛불만 은은하게 켜져 있고, 두꺼운
망토를 입은 점쟁이 하나가 앉아 있었다. 벽에는 각종 박제들이
걸려 있고……' 하는 식으로 쓸 수밖에 없다. 조금 다르게 이해하면 글의 묘사를
주관적으로 쓴다는 것은 낯설게 만드는 것이며, 창의적으로
쓴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쓰되 창의적으로 쓴다는 건 욕심이다. 절충안쯤 된다.
일반적인 묘사를 쓰되 조금 특별한 것을 집어넣으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할 수 있다. 이어서 같은 소설의 다른 문장들도 보자.
1) 그곳을 나온 마틸드에게 남은 건 팔 끝에서 흔들리는 가벼워진 핸드백과
우스꽝스러운 예언뿐이었다.
2) 그러면 그녀의 몸은 출근 시간의 포화된 공기 속으로 뿌려져 지하철역 사방에
흩어질 텐데. 남은 흔적이라곤 찢어진 꽃무늬 원피스 조각과
교통카드뿐일 텐데.
1)은 점집을 나온 이후의 묘사다. 객관적인 묘사를 쓴다면, '마틸드는 돈을 쓴
탓에 침울해져 있었다.' 정도의 심리묘사를 할 수 있다. 그것이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델핀 드 비강은 그보다 훨씬 효과적인 방법을 썼다.
대표성을 띠는 문장을 사용하는 것이다. 왜 작가는 핸드백과 예언에
대해 썼는가? 이전에 표면효과(기법-4)에 대해 다뤘는데, 그것과도 연관이 있다.
작가가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독자들은 이해할 수 있다.
묘사는 이렇게
쓰여야 한다. 심리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성을 띠는 문장을 이용하는 것.
0)의 경우도 그렇다. 작가는 '숄'과 '수정구'를
다루면서 문장을 조금 비틀었다. 2)에서는 지하철 사고에 대해 묘사를 했는데,
연기가 어떻고 비명소리가 어떻고 하는 문장은 일체 쓰이지
않았다. 대표성을 띠는 두 가지만 사용했다. 꽃무늬 원피스와 교통카드. 이
소재는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다이아 반지일 수도, 명품 가방일 수도,
신상
구두일 수도 있다. 우리가 저 문장에서 멈칫하는 건 작가의 짙은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예를 보자.
1) 그는 오유의 운영자를 만났다. 키가 훤칠한 남자였다.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을 접했는지 시종 신사적인 태도였으며, 목소리에는 진중한 울림이
묻어났다. 그는 그것을 연륜이라고 생각했다. 그런가하면 눈두덩이 아래에는
희미한 다크서클이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오래 굳어져
익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이 오유의 운영자에 대한 그의 감상평이었다.
2) 그는 오유의 운영자를 만났다. 볼펜과 손수건을 들고 다니는 남자였다. 그가
두 물건에 대한 연관성을 묻자 메모를 하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메모는 지우는 데에 의미가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손수건에
메모해뒀다가 빨면서 다시 기억하는 것은 신선한 방법이기는 했다.
오유의
시스템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모양이군, 하고 그가 오는 길에 무심코
중얼거렸다.
두 문장에는 큰 차이가 있다. 1)은 객관적으로 쓰였다. '오유의 운영자'에 대한
묘사인데, 대부분 판타지 소설이나 추리 소설에서의 묘사는
이런 식으로 쓰인다. 덧붙여 고전소설들의 작법은 이러했다. 충실하게 작법의
원칙을 지켜서 쓰였다. 그런가하면 현대소설들은 2)와 같이
쓰이고, 쓰여야 한다. 주관적으로 쓰인, 2)에 대해 더 자세히 분석해보자.
오유의 운영자는 무엇을 들고다닐까. 무수하게 많은 것들이 있고, 우리는
무수하게 많은 것들 중 의도적으로 어떤 것들을 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오유의 운영자가 들고 다니는 것이 빨간 팬티라면 어떤가. 조금 더 심화해서
보자면(지금까지 배워왔던 것들을 써먹어보자면)
빨간 팬티는 거리감이
있는 소재다. 구체화를 통해 거리감을 좁힐 수 있는데, 운영자의 "징크스가
있어서요." 라는 대화나, "습관입니다."
하는 식의 대화로 납득을 시켜줄
수 있다. 이 2)의 방법은 1)에 비해서 훨씬 좋다. 소설의 질감을 낯설게 만들며,
인물을 쉬우면서도 효과적으로
비틀 수 있고, 직접 서술하지 않아도 표면 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다.
그 외의 묘사와 관련된 대화도 그렇다. "오유의 시스템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모양이군." 이라는 대화는 어떠한가. 가령 다른 대화라도
좋다. "나와는 잘 안 맞네." 라는 대화도 좋다. 이 대화를 통해서는 작중 '그'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대화를
통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럴 수도 있겠다, 는 것이다. 우리는 대인 관계에
있어서 앞에서는 웃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인간의 이중성을
표현했다고 해도 좋다. 즉 주관적인 묘사라는 것은 소설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참신함이며, 기존의 답습된 묘사에서의 탈피
라고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글의 서술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1인칭에서도 마찬지다.
가령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떠올려 보라.
주인공 시점에서 보는 것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혼동되는 서술을 써서는 안
된다. 서술에서의 객관성(명확성)과 주관성은 별개다.
묘사에 있어서는 주관적이어야 한다. 어떤 내용을 묘사해도 똑같다. 편의점을 묘사해도, 기숙사를 묘사해도, 대학교를 묘사해도 똑같다.
대표성을 띠는 문장을 사용하라. 읽기 싫은 묘사를 사용하지 말 것. 그 점을 유념해야 한다. 만약 '그 성은 -하고, -했으며, -에 지어졌고' 식의 객관적인 묘사를 쓰면 단편 소설의 분량에서는 치명적인 결함이 된다. 사실 판타지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 드래곤의 둥지는-' 보다야 '드래곤의 둥지는 철로 된 계란이었다.'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제 아무리 철로 만들었어도 결국 계란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먼치킨 주인공 들에게 깨져온 것들을 생각하면.
구성 : 「소설은 어떻게 쓰는가?」
소설은 어떻게 쓰는가. 어려운 문제인데 반해 대답은 명료하다. 소설은 쓰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이 문장을 단지 비유적인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렇다. 아니라고? 그렇다면 그 의문을 가지고 다음으로 넘어가보자.
소설을 잘 쓰는 사람은 많다. 아주 많다(실제로 책게에도 많다). 하지만 그건 문단에 한정된 것이다. 즉, 소설을 잘 쓰는 것과 단편 소설을
만들어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왜? 우리는 여기서 다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소설을 잘 쓰는 게 소설을 잘 만드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의문도 그대로 가지고 가보자.
백일장에서는 소재나 주제따위를 던져준다. 가령 '교통사고'라는 소재를 준다면, 대개는 천 자 내외에서 글을 쓴다. 거기서의 완성도는
천차만별이지만, 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상당한 수준의 글을 써낼 수 있다. 그것이 문단의 수준이다. '교통사고'를 가지고 천 자를 쓰는 것과
단편 소설을 만들어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다. 조금 더 설명하면, 소설을 쓰는 능력은 문장을 쓰는 능력과 별개에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가 발생한다. 필력은 좋은데 소설은 별로인 경우, 짧은 소설은 잘 쓰는데 단편 소설은 쓰지 못하는 경우.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구성」에 있다.
당신의 목표는 무엇인가. 작가지망생이라면 1차적인 목적은 아마 등단에 있을 것이다. 2차적인 목적은 작가가 되는 것, 즉 소설집을 출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0차적인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다른 사람에게 떳떳하게 보여줄 소설 한 편을 쓰는 것'에 있지 않을까. 그것이 온전한 타인이
아니어도 좋다. 친구여도 좋고, 친척도 좋고, 하물며 가족도 좋다. A4용지 한 장 내외의 글을 주면서 '제가 쓴 소설입니다.' 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소설은 대체 어떻게 만드는 것인가. 왜 필력은 좋으면서 완성도 높은 단편 소설 하나를 써내지는 못하는가. 앞서 이야기했지만,
두 가지는 일치하지 않는다. 필력과 구성을 하는 능력이 같은 선상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구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보자.
결국 구성이란 것은 「글을 어떻게 만들겠다」는 도안이다. 초고라고 해도 좋고, 설계도라고 해도 좋다. 물론 이 구성이 필요 없는 경우도 있다.
게임 판타지 소설이나 판타지 소설의 경우가 그렇다. 혹자는 '장르 소설이라고 무시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할 수도 있다. 자,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당신이 알고 있는 족히 열 권은 되는 분량의 판타지 소설들은(비뢰도나 묵향, 달빛 조각사와 같이 수십 권 분량의 소설들도) 어떻게 쓰였을 것 같은가. 설마하니 30권 내용을 머릿속에 이미 다 담아두고 썼을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판타지 소설들은 소재주의에 가깝다. 무엇을 소재로 쓸 것인지를 정하고, 목적은 스토리텔링에 있다. 재미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완성도나 작품성과는 거리가 멀다.
도대체 단편 소설은 어떻게 쓰이는가. 그건 다음의 과정들을 거친다:
- 무엇에 대해 쓸 것인가:
-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 어떤 방법으로 쓸 것인가:
-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 결말은 어떻게 낼 것인가:
간략하게 말하자면 위와 같다. 1)은 소재에 관련된 것이다. 비운의 가족사를 쓸 것인지, 비참한 전쟁에 대해 쓸 것인지, 왕따 문제를 쓸 것인지,
성장에 관한 것을 쓸 것인지, 젠더와 섹스에 대해 다룰 것인지, 철학적 깨달음에 대해 쓸 것인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쓸 것인지, 사회상에 대한
풍자를 그려낼 것인지. 이 외에도 무엇을 다룰 것인가의 문제가 여기에 해당된다. 만약 '판타지 소설을 잘못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 용을 잡는 회사원의 이야기를 쓴다'면 여기에 해당한다. 사실 이 부분은 모든 글쟁이들이 겪는 부분이고, 더 언급할 필요는 없다.
문제가 되는 건 2)에 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이 부분은 추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대충 ~에 대해 쓰겠다는 것도 안 된다. 명확하게
이야기 하려는 바가 있어야 한다. 물론 필요 없는 경우도 있다. 즉, 주제가 없는 소설도 있다. 형상화를 쓰는 경우다. 이 경우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소설에는 주제가 있어야 한다. 이것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이유는 '글에서 어떻게 녹여내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서술할지, 어떻게 전달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막역하게 숨기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잘 모르게 되고, 직접 서술하면 소설의 질이 낮아진다.
3) 은 수단과 도구에 있다. 의미화를 쓸 것인지, 구체화를 쓸 것인지, 형상화를 쓸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충돌 기법이나 재배치, 문학적 선택이나 인물 비틀기… 하여간 방법은 무진장 많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아니, 소설은 창작인데 이건 너무 정형화된 것
아니냐. 그렇게 쓰이는 걸 과연 소설이라고 할 수 있나?' 그 의문은 당연히 제기될 수 있고, 정당한 비판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소설이란
것은 문학적으로 가공된 것이며, 높은 완성도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구성을 건너 뛰고 즉흥적으로 써도 단편 소설은 만들어낼 수 있지만 완성도는 보장할 수 없다.
4) 는 조금 더 복잡한 문제다. 고급 기술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전에 독립적인 문장에 대해 다뤘는데, 문장이 독립적으로 쓰이지 않기 위해서
순서를 어떻게 짤 것인가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기회가 되면 다시 다룰 예정이다. 5)에 대해서는 생략하겠다.
위의 항목들은 이론 설명을 위해 나열한 것이고, 실제 소설을 쓸 때에는 저렇게 한 문단씩 적어놓고 대답할 필요는 없다(당연하다). 다만 저 과정들은 머릿속에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흔히들 다상(多想)이라고 하는데, 소설을 쓸 때에 정말 필요한 것은 '오래 쓰는 것'이 아니라 '오래 생각하는 것' 에 있다. 위의 구성이 끝나면 소설을 놀랄만큼 빠르게 써진다. 남은 건 퇴고에 들어가는 시간뿐이다.
이전에 '[지영]은 이가 아팠다'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 글에서 형상화와 구체화가 제대로 되지 않은 이유는(사실 희철이 썩은 이라는 것도 너무 평범한 발상이고, 또 뻔하다) 구성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좋은 형상화가 되기 위해서는 의미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의미화에 대한 것은 다음과 같다.
지영에게 희철은 [ ]다.
위의 공백을 만들고 나면 여러가지 사물들을 넣어볼 수 있다. 썩은 이, 쓰레기통, 라면 스프, 심장, 마이크… 어떤 것도 쓸 수 있지만 앞에 열거한
것들은 대게 사물 본래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령 희철이 쓰레기통이라고 한다면 소설을 보지 않아도 지영과 희철의 관계에 대해
짐작할 수 있다. '희철은 [단추]다' 라고 하면 이야기가 다르다(차라리 그렇게 쓸 걸…). 없으면 허전하지만 다른 단추를 달면 되는, 그러한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구성의 단계에 있다.
즉, 완성도 높은 소설 한 편(남에게 떳떳하게 보여줄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면 구성에 대해 생각하라. 오래 생각하라. 무엇을 다룰지, 무엇에
대해 쓸지, 무엇을 주장할지, 어떤 방법을 쓸지, 무작정 소재를 가지고 쓰는 것은 피하라. 모든 소설들은 즉흥적으로 쓰이지 않았다.